반란군 수괴 전두환, 노태우는 천수를 누렸고 졸개들은 지금도 잘살고 있다.

 

글: 지승룡(목사, 전 민들레 영토 대표)

 

남산골 한옥마을 ‘충정사’는 정권찬탈 작전명‘충정’에서 딴 것

한옥마을 ‘천우각’ 앞 큰 마당은 ‘서울의 봄’의 수방사 연병장

정승화가 합수부장에서 해임하려고 하자 반란 일으킨 전두환

반란군의 공격을 알면서도 의를 택한 김오랑 소령 끝까지 저항

부인 백영옥은 충격으로 실명하고, 구명 투쟁 중 실족하여 사망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자살, 수경사령관 장태완 부친 화병 자살

‘서울의 봄 ’당시 신학대학원생으로 죽을 각오로 대 반란군 투쟁

 

▲ 반란군 진압에 전력을 다한 장태완 장군의 젊은 시절 모습.
▲ 반란군 진압에 전력을 다한 장태완 장군의 젊은 시절 모습.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 우측에 ‘충정사’란 절이 있다. 지금의 한옥마을은 그전 수도방위사령부였고 이 충정사 자리에는 수방사 장병면회소와 PX가 있었다.

10.26 이후 하나회 군부는 대권을 잡기로 하고 12.12 반란과 광주학살을 진행하였다. 5공을 만든 하나회 신군부 작전계획 이름이 충정이다.

12.12일 반란군이 성공하고 노태우가 수방사령관이 되면서 하나회 불교 신자들이 5공 정부 탄생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충정사란 사찰이 지어졌다.

유쾌한 사찰명이 아니기에 변경이 되기를 바란다. 한옥마을에 친일가옥이 3채가 있다. 장태완 기념관이 있어야 한다.

한옥마을 천우각 앞 큰 마당이 서울의 봄에 나오는 수방사(당시 수경사) 연병장이다. 필동에 있는 할인이 많은 대한극장에서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한옥마을을 둘러보는 것 추천한다. (대한극장은 월요일 휴관)

12.12 관련된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 얼굴책에 그동안 상세하게 게시했다. 악은 참으로 부지런하다. 욕망이기에...지금 이 욕망에 부지런한 자들을 기억하는 자를 기억하자.

김오랑 소령은(영화에서 정해인) 12일 저녁 아내 백영옥에게 전화로 "오늘도 집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미안해" 라고 말한다. 백영옥은 미안해란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여인의 예감처럼 이 통화는 남편이 아내에게 들려준 마지막 음성이 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이 자신을 보직 해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총장을 연행하려면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결재를 받아야 함에도 하나회를 신군부 사조직을 통해서 12일 저녁 군사행동을 저지른다.

당시 신군부에 속하지 않은 군단급 지휘관이 있는 군단급부대로 서울에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부대는 특전사령부와 수도경비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다.

전두환은 이 두 곳의 사령관과 군의 이동을 통제할 수 있는 헌병감 세 사람을 저녁 연희동 요정에 초대하여 만취작전을 썼지만 실패하고 이 세 분은 신군부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김오랑 소령은 김해공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또 강직한 군인으로 인정이 되어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의 비서실장이 된다. 육사 24기 조경철은 육사 25기인 김오랑을 눈여겨보았고 여동생 친구 백경옥을 소개한다. 당시 김오랑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었고 백경옥은 부산대 간호대를 나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펜팔로 사랑을 나눈 이들은 1973년 결혼했다. 1979년 12월 두 기수 선배인 박종규 부부와 친한 김오랑 부부는 11일에도 같이 식사를 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12일 박종규는 김오랑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부대가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러 갈 것이니 대세를 따르라고 말한다.

인맥보다는 임무완수를 우선으로 하는 김오랑은 이 말을 거부하고 반란군에게 저항하다가 박종규의 발포 명령으로 시작된 M16 소총 6발을 맞고 사망한다. 35세였다.

백경옥은 극한 슬픔으로 일주일 이상을 울먹이다가 시신경마비가 와서 시력을 상실하게 되어 부산 고향으로 내려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전화 상담 봉사를 한다.

1987년 김오랑 소령이 모셨던 정병주 전 사령관이 부산에 부인을 만나려 내려온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이 키우고 아껴준 박희도, 최세창에 의해 총격을 당하고 체포되어 군복을 벗었다.

정병주와 백경옥은 그냥 울었다. 그리고 살아서 저 신군부 놈들이 망하는 것을 보자고 하며 그의 아들 박사 학위논문집을 선물한다. 그 논문집 서문에는 참 군인 ‘김오랑 소령을 위하여’란 글이 있었다. 신군부의 역적을 고발하던 정병주는 1989년 자살을 하고 백경옥은 1991년 43세에 실족사하게 된다.

그의 두 아들은 연대 75학번 76학번으로 학군장교였고 75학번 큰아들은 79년 당시 소위로 임관했으니 그의 군 생활이 어떠했을까?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역사는 마무리되었다.

백영옥이 남긴 마지막 시다.

“나는 그대의 무덤가를 다녀오네

구름이 떠서 비가 내려 내 얼굴을 적시고

몇 송이의 꽃을 그대의 비석 앞에 바치고

나는 훌훌히 떠나는 파랑 새되어

그대 곁을 떠나온다네

그대여 안녕, 안녕.”

신군부의 반란에 맞섰던 이름을 기억한다.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방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하소곤 육본작전참모장, 그리고 몇 분들

장태완 장군의 신군부에 한 말이 들린다. "야 이 반란군 새끼야! 역적놈의 새끼들" 광주는 이 거룩한 분노를 이어갔다. 그리고 나에게도

‘서울의 봄’이란 제목이 와 닿는다. 우리는 80년 봄을 희망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80년 5.18일 생애 처음으로 6시간이란 긴 기도를 땀 흘리며 했고 기도 응답은 신군부 세력에 대하여 청년으로 신학도로 구도자로 저항한다는 결심이었다. 죽어도 좋다는.

언제가 좋을지 생각했다. 그 시절은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라 정황을 파악하고 행동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서 6월 27일 오후 6시 직장인들 퇴근 시간 명동역 자리로 했다.

유인물 일천 장을 준비했다. 단절의 시대지만 최소한은 알리기 위해 홍만조 목사님에게는 기독교 쪽에 그리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친구 이종철에게는 학생운동 쪽에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하는 시위로 준비했다. 아침에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데 종철이가 초인종을 누른다. “왜 왔어?”라는 나의 말에 가는 길 배웅하려고... 방으로 들어온 그는 시간이 지나자 중대한 결심을 나에게 전한다.

나랑 같이 행동하겠다고.. 지금 생각하면 종철이가 이 결정을 내리는데 얼마나 깊은 고뇌가 있었을까! 안 된다고 하자,

만약 자신과 동행하지 않으면 부모님에게 나의 계획을 말하겠다고 한다. 몇 차례 언쟁이 있었지만 결국 설득되었다.

얼마 전 책자를 보니 한 줄로 우리 두 사람 행동이 학생 운동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보았다.

치밀하게 악의 부지런함이 이 겨울 있을 것이고 내년 우리 희망의 봄을 권력 찬탈의 봄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이 있을 때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봄을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노도의 물결이 퍼지길 바라면서

비 오는 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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