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성리학적 이상을 새긴 도시다.

글: 김정락(미학자, 서울대 서양화 전공)

 

조선의 한양은 성리학적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

삼봉 정도전, 서울에 행정계획, 5백년 조선 새겨

전조후시, 좌우묘사 기본적인 배치로 도시 완성

조선, 명 제후국이라 제후칠궤로 7대 수레 로폭

김포 서울시 편입시도, 표 구걸, 서울 괴물만들기

 

▲ 조선의 한양도성 그림. 도성은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 조선의 한양도성 그림. 도성은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성리학적 도시계획>

흔히 도시계획이나 도시공학 따위를 말하면, 건축학과 (도시)사회학의 통섭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도시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문명이라는 학자도 있고, 도시란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관계라고 여기는 것도 일반적이다.

도시는 자생적으로 발전된 공동체적 환경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의지로 생성된 경우도 적지 않다. 즉 계획도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도시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도시계획과 건설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추진된 한양천도이고, 천도는 과거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곳을 왕조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건설이 필요했다.

주목되는 것은 도시계획의 원칙이나 이념이 성리학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성곽을 비롯해 모든 것을 새로 짓고 길을 내는 것을 구상하고 지휘한 이는 삼봉(三峰) 정도전이다.

그는 이성계를 앞세워 건국했으며, 정치는 물론 여타 행정체계와 향후 5백 년간 유지될 국가지도이념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도시계획의 이념을 가져온 원천은 바로 주례의 ‘고공기’이다.

원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주어진 지정학적 환경을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 한양의 건설이었다. 거의 50리에 이르는 한성성곽은 별도로 치겠다.

왕도의 여러 시설은 궁궐을 중심으로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기본적인 배치를 취했다.

국가행정을 담당하는 관아는 궁궐 전면에 포진시켜서 왕의 관할 하에 놓이게 했고, 시장(경제영역)은 그 뒤에 자리 잡아 후(后)가 관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태묘(=종묘)는 궁궐의 왼쪽에, 사직(社稷)은 오른쪽에 두었다. 궁성 문의 수나 도로의 폭은 왕도의 위계를 반영하였는데,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후칠궤(諸侯七軌)’라 하여 궁궐 앞 대로가 7대의 수레가 나란히 지날 폭으로 정해졌다.

이와 같은 계획이념은 초기에 백악에 붙은 궁궐로 인하여 시장을 궁궐의 뒤가 아니라, 궁궐과 청계천 사이로 정했다. 동서로 긴 종로에 행랑들을 건설하여 시장으로 삼았다.

또한, 태종 이방원은 창덕궁을 신축하여 법궁을 이전함으로써 궁궐 앞에 종묘가 있는 기형적인 방식으로 정도전의 계획을 틀었다.

하지만 광화문, 숭례문, 흥인지문, 근정전 등 정도전이 정해놓은 이름은 여전히 남아서, 성리학 이념 위에 건설된 나라의 위상과 포부를 보여준다.

■ 대륙에서 원, 명, 청 등 거대한 제국이 명멸할 때에 조선은 고요히 사대부의 나라를 세워 5백년을 이어갔다.

고려 말에 일어선 반듯한 유자들은 하늘의 이치를 지상에서 실현하고 싶었다. 기운을 다한 도읍을 버리고 남경으로 천도를 단행했던 왕과 신하들은 도성을 쌓고, 그 안에 천년 왕도를 건설하였다.

한양이 커져 서울이 되었다. 그리고 선거표심에 영악한 정치인들은 이제 서울을 거대한 괴물(게리맨더링)로 만들려 하고 있다. 권력과 욕망은 하늘의 이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7백 년 전보다 퇴행한 의식이 그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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