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이상룡은 대일 독립전쟁의 대부이자 역사투쟁가였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석주 이상룡, 조선독립투쟁을 실천으로 옮긴 독립투쟁의 거두

머리를 자를 지언정 무릎꿇어 일제의 노예는 될 수 없다고 다짐

신흥무관학교창설, '대동역사' 저술, 학생들에 민족정기 새겨줘

제국주의 외세에 종속된 외교독립론 거부, 무장투쟁 실천 강조

 

▲ 석주 이상룡. 그가 썼다는 대동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석주 이상룡. 그가 썼다는 대동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안동에 다녀왔습니다. 석주 이상룡에 관한 짤막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던 1911년 2월 27일 압록강을 건너며 쓴 ‘강을 건너다(渡江)란’ 詩.

渡江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朔風利於劒)

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凓凓削我肌)

내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肌削猶堪忍)

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腸割寧不悲)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此頭寧可斫)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此膝不可奴)

(......)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爲誰欲遲留)

호연히 나는 가리라(浩然我去矣)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두 번째 이야기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 못지 않게 국사교육에 집중했는데, 국사교과서는 이상룡이 지은『대동역사(大東歷史)』였다. 『대동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상룡이 『서사록』에 쓴 역사이야기를 보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1911년에 쓴 글에 이미 조선총독부가 역사왜곡에 나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주요 논리를 논파한다는 점이다.

- 한사군(漢四郡)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

이상룡은 기자(箕子)를 한반도로 끌어들인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역사관을 강하게 비판한다.

대한민국 강단매국사학은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섰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섰고, 그 자리가 지금의 평양이라고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주장하지만 이상룡은 기자는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고 각종 사료를 가지고 갈파했다. 이상룡은 또 안화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사군의 옛터는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안화진에게 답하다(答安和鎭)」, 『석주유고』 권3)」

한사군은 모두 한반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각종 사료를 섭렵한 결과 얻은 결론이다.

세 번째 이야기.

'외교독립이야, 무장투쟁이냐'

정치에는 노선이 중요하다. 한 나라가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1910년 망국 후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국가 건설 노선은 공화주의였다. 여기에 바로 한국 독립운동의 가치가 있다.

해방 후 세울 새 나라는 대한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민(民)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으로 만들자고 설정한 것이다. 이런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선을 두고 둘로 갈렸다. 하나는 '외교독립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론'이었다.

외교독립론은 미국ㆍ영국 등의 외교적 후원에 힘입어 독립을 이루자는 노선이었고, 무장투쟁론은 군사를 양성해 결정적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여 해방을 이루자는 노선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직후부터 내분에 휩싸인 것도 노선 차이 때문이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 위임통치 청원서'를 보낸 것이 문제였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25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미국의 윌슨에게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000만의 이름으로 각하께 청원하나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하에서 벗어나게 하여 장래 완전 독립을 보증하시고 아직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두게 하시옵소서"라고 요청했다.

당시 미국에 사는 친구의 편지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신채호는 박은식ㆍ김창숙과 함께 펑펑 울었다. 김창숙은 "물론 왜인(倭人)의 한국 침략이 분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미국의 위임 통치하에 넣겠다고 하므로… 우리 3인이 통곡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3인은 이승만씨를 임시정부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경향신문 1962년 3월2일자)라고 회고하고 있다.

신채호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라고 이승만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당시 외교독립론은 임시정부의 단합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였다. 임시정부의 소재지가 상해였던 것도 문제였다. 무장투쟁론자들은 일제와 무장투쟁이 가능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이 가능한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에 임시정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만주에서는 3·1운동 직후 만주 자치 운동과 무장투쟁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상룡(李相龍·1858~1932년)을 총재로 추대해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해의 임시정부는 여운형을 만주에 파견해 군정부의 임시정부 합류를 요청했다. 만주 인사들 사이에 큰 거부감이 일었다.

만주 무장투쟁론자들 사이에는 상해에서 무슨 독립운동을 하느냐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상룡이 "(상해에 정부를) 이미 세웠으니 한 민족에게 어찌 두 정부가 있을 수 있으리오"라면서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군정서(軍政署)라 하여 독판제를 채용했다'('행장')고 전하는 것처럼 상해에 정부를 양보했다. 그래서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편해서 최고 책임자인 독판에 이상룡을 선임했다.

"외교와 내정보다는 군사와 재정이 더 중요"

이 무렵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안창호는 '외교와 내정(內政), 재무와 군사가 임시정부의 4가지 대단(大端)'이라면서 의견을 구했다. 즉 임시정부의 정책 우선순위는 '①외교 ②내정 ③재정 ④군사'라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임정의 첫 번째 노선인 외교독립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외교 상황입니다. 이것은 가장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현재 구미(歐美) 지역에는 여론이 하나가 되어 우리를 지지하고 일본을 배척하고 있는데, 공리(公理)와의 싸움에서는 여론이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곧 개최될 국제연맹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승기를 잡아 칼자루를 쥘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괄적인 말이고, 구체적인 교섭은 이미 영국·미국과 상당한 양해를 얻어놓았으니 머지않아 어떤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안창호의 편지를 부치다')

그러나 이는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 상황을 오판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국제연맹은 창설 당시부터 일본이 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와 함께 상임이사국이었고, 게다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다.

미국은 1905년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서 일본의 한국 점령을 비밀리에 승인했고, 영국은 이보다 이른 1902년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의 제1조는 '영국은 청(淸)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며,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국과 영국이 일본과 싸워서 한국을 독립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이상룡은 답변에서 "제 생각으로는 이 일은 외교로 시작해서 혈전으로 마치는 것으로서 이는 특별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외교독립론을 선택한 임시정부의 노선을 직접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은 '혈전으로 마친다'는 무장투쟁론의 방침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상룡은 안창호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삼가 합하께서는 지금부터 앞에서 정하신 네 가지 대단(大端) 중에서 조금 순서를 바꾸어 제4항을 제1항으로 하고 제3항을 제2항으로 삼아서 이 일에 전력을 경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이른바 제1항과 제2항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잘 성취되리라고 봅니다."('안도산 창호에게 드리다')

즉 임시정부의 '①외교 ②내정 ③재정 ④군사'의 순서를 '①군사 ②재정'의 순서로 바꾸면, 외교와 내정은 '저절로 잘 성취'되리라는 권고였다.

출처:

1.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18497908758870&id=100017959833091

2.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4. 외교독립이냐, 무장투쟁이냐 - https://v.daum.net/v/2015070809401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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