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생활사료로 전해오는 경우가 많다.

 

글: 이범주(시사평론가)

 

단재 신채호가 인용한 해상잡록에 ‘춘향전’, 단심가

고구려 ‘춘향가’에 안장왕=이도령, 백제태수=변사또

역사,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 단단히 뿌리 박히게 해

만주 등 넓은 역사 버리는 역사 왜곡은 반민족 행위

▲ 단재 신채호는 해상잡록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안장왕과 한주 백제태수와의 이야기를 전하여 춘향전이 고구려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편집인 주). 자료: 나무위키 편집
▲ 단재 신채호는 해상잡록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안장왕과 한주 백제태수와의 이야기를 전하여 춘향전이 고구려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편집인 주). 자료: 나무위키 편집

 

고구려판 춘향전과 그때 나오는 단심가(丹心歌)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장남이다. 그는 태자시절에 상인행색을 하고 백제의 개백현(皆伯縣 지금의 고양군 행주)를 여행했다.

그곳의 장로였던 한씨의 딸인 한주(韓珠)가 절세 미녀였는데 안장왕은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해 그녀와 은밀히 정을 통하고 부부의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의 태자다. 귀국하면 대군을 이끌고 이 땅을 취한 뒤 그대를 맞이하리라” 하고는 달아났다.

문자왕이 죽고 왕위를 계승한 안자왕은 장군을 자주 보내 백제를 쳤지만 항상 패배했다.

한편, 한주의 미모를 들은 그 곳 백제의 태수는 한주의 부모에게 한주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주는 죽기를 거부하고 거절했다.

분노한 태수는 적국과 내통한 죄를 물어 한주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온갖 감언으로 꾀기도 했다.

한주가 옥중에 노래하기를,

“죽어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

노래를 들은 태수는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죽이기로 작정했다.

안장왕은 한주를 구하기 위해 을밀을 보냈다. 을밀은 수군 5천명을 거느리고 20명의 결사대를 뽑아 평복 속에 무기를 감추게 하고 이들과 함께 개백현에 미리 들어갔다.

개백현 태수는 자기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크게 벌였다. 이 기회를 빌어 한주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으나 다시 거절당하자 태수는 대노하여 빨리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그 때 초청무사를 가장해서 연회장에 들어간 을밀의 장수들이 칼을 빼어 손님들을 살상하고 고구려 10만 백성이 쳐들어왔다고 외치자 성 안이 크게 요동했다.

이 틈을 타서 을밀은 병사들과 함께 성을 넘어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풀어주었다. 안장왕은 개백현으로 가서 한주를 만났다. 이상은 해상잡록(海上雜錄)에 기록된 것이다.

이상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역사의 아침 341~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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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지 아니한가. 이야기의 구조가 고전소설 [춘향전]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답으로 포은 정몽주가 즉석에서 답했다는 단심가(丹心歌)도, 위의 이야기가 맞다면, 고구려 이래로 전해 내려온 시를 상황에 맞게 인용해서 이방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하겠다.

조선시대까지도 삼국시대에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내용들이 민간에 전승되면서 사람들의 상식과 가치관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지금 사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도 그만큼 빈약해진다. 역사는 곧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이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틀이 세워지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단단히 뿌리박히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 곧 선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억과 전승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신적인 뿌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에서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활동했던 상고사를 빼버리고, 근현대에 들어 국내와 중국내륙, 만주벌판에서 뜨겁고 끈질기게 이어졌던 독립운동의 거대한 흐름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범죄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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