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료는 하나도 없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낙랑군, 19세기까지 중국은 산해관 끝으로 인식

일제 만철 조사부, 요녕성 요양 서북부로 비정

이나바이와키치 낙랑군 수성현, 황해도 수안 주장

조선사편수회 부역자, 이병도가 수안설 이어받아

평양서 출토된 낙랑 관련 유물 유적 일제가 조작

낙랑군 속현 점제현비도 조작, ‘비’라는 용어 안 써

북경 유리창서 낙랑유물 대거 수집해서 가져와

▲윤내현의 고조선연구. 위만조선과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난하 유역으로 밝혀졌다(편집인 주). 

 

<전라도천년사>,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10)

문성재의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 의하면, 중국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에 있었다고 여겼답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일본학자들이 평안도 평양지역을 낙랑군으로 단정하면서, 만철조사부 소속인 송정등(松井等, 1877-1937)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요양 서북부로 비정했다고 합니다.

만철은 '만주총독부'라고 부를 정도로 만주의 식민화와 중국 본토 침략을 지원하는 일제의 전진기지였습니다.

이듬해인 1910년에는 같은 만철 조사부 소속의 이나바 이와키치가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라는 논문에서 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문은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이라는 증거를 전혀 대지 못한 치졸한 논문이었다고 합니다.

19세기까지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여긴 산해관을 넘어, 이제는 '황해도 수안'까지 오게 된 것이 만철 조사부 사람의 주장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요.

이는 오로지 낙랑군을 평양에 비정하기 위한 술수였을 따름입니다.

심백강은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이라는 책에서 <사고전서>에 나오는 모든 낙랑을 살피고 있습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청나라 건륭(1736-1795) 연간에 학자 1,000명을 동원하여 10년에 걸쳐 만든 책으로서, 청나라 이전 중국 사료를 모두 모은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료집이라고 합니다.

심백강은 <사고전서>에 나오는 20개의 낙랑을 모두 살핀 후,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심백강이 <사고전서> 연구를 통해 밝힌 바에 의하면,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기점은 호타하 북쪽의 갈석산에 있던 '낙랑군 수성현'인데, 그곳은 현재의 '서수현 수성진'이라고 합니다.

낙랑군은 난하 중•하류 유역으로부터 갈석산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펼쳐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병도는 낙랑군 수성현이 현재 중국의 서수현 수성진이 아니라,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910년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가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낙랑군 수성현이 언급될 당시에는 황해도 수안군이라는 명칭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학자들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태두라는 분이 만리장성의 기점이라는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했으니, 중국학자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이병도가 애써 그렇게 주장'했으니, '중국학자들은 한국의 고대사가 중국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 관변학자들의 연구가 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 유적과 유물은 그럼 어떻게 되는가요?

평양에 존재하는 낙랑 유물 유적은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발굴하고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유물 유적들은 당시 신채호나 정인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아 왔습니다.

1960년대 북한의 연구를 시작으로 1980년대에 이를 정리한 윤내현에 이르면 낙랑 유물 유적은 더 이상 거론하기도 창피할만큼 철저히 비판되었습니다.

윤내현은 <고조선연구, 상>에서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제시한 고고 사료인 고분, 토성, 봉니, 인장, 점제비, 효문묘 동종 등'을 철저히 검증하여, 일부가 위조인 것은 물론 위조가 아니더라도 낙랑군이 있었다는 증거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이후 실제로 이 낙랑 유물 유적을 절대시하는 학자는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안정준 같은 '무서운 아이들'이나 거짓말로 위장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만약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 유적과 유물들은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함경도 전역에서 출토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모든 유물과 유적들이 평양 한군데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문성재의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는 일본 학자들이 유물을 날조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는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이마니시 류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마니시 류는 용강에서 발견된 각석에 새겨진 '점제'가 한나라 낙랑군 점제현을 나타내며, <한서 지리지>의 열수가 대동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서 쓰다 소키치는 <한서, 지리지>의 열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했으며 이병도 역시 이 주장을 적극 추종하였기 때문에, 그후 국내 사학계에서는 '열수대동강설'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정설로 굳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대에는 비석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 근대 학자인 마형(1881-1955)의 고증에 따르면, 비석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한 것은 한대 이후부터였다는 것이지요.

진시황이 각지의 명산들을 순행할 때도 자신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면서 '각석'이라고 하였고, 한무제가 진시황을 흉내내면서 가는 곳마다 자신의 공적을 바위에 새겼지만 '비'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비석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한 것은 후한대 이후부터였다는 것입니다.

금석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정인보는 '점제현 신사비'라는 석각을 면밀히 분석한 후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는 위조품이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또한 '신의 손'이라고 알려진 세키노 다다시는 '효문묘 동종'등 여러 유물을 발견하였고,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한대의 대방군으로 단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정 7년(1918년)에 작성한 그의 일기를 보면,

'(중국 북경에 있는)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이라고 기록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을 주고 무엇 때문에 조선총독부를 위해 한대의 유물들을 구입했을까요?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이틀 후에 세키노 다다시는 또다시 유리창에 들려 낙랑 출토품들을 힘닿는 대로 다 사들였다는 것입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그 유물이 평양 근처에 있어야 할 텐데, 왜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했을까요?

낙랑군은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존재했으며 한반도 평양지역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를 쓴 문성재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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