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는 생명체도 한반도의 것과 닮아 있다.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단군과 유화부인의 고장 북만주 버드나무 많아

봉림고성, 흙으로 쌓은 토성, 고유의 치도 나와

온돌 유적도 출토,  신석기 청동기 유물 사라져

봉림고성은 왕궁이고 포대산 유적은 제천단

북 왕궁, 남은 제천단, 북경 청나라 것과 유사

제천단 3층 구조, 북두칠성 상징 7개 구덩이

우수리강에 다슬기 천지, 송화강에는 말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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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대산 유적을 알리는 표지석 

 

삼강평원 답사 3일 째 여행기입니다.

③ 5월 21일(일요일)

쌍압산시 → 봉림고성(鳳林古城) → 포대산(炮臺山) 유적

→ 요하현(饒河縣)박물관

오늘은 이동 거리가 5시간 정도다. 그러나 지역이 넓고 유적이 평원 한적한 곳에 있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듯이 유적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쌍압산시 중앙을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우수리강으로 들어가는 칠성하(七星河) 좌우에서 봉림고성과 포대산 유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쌍압산시 동북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완달(完達)산맥을 넘어 요하현으로 가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하여 호텔에 아침 식사를 주문해서 6시 30분에 출발했다. 쌍압산시 중앙대로는 얼마나 넓은지 참으로 부럽다. 넓은 땅이 나라 소유이고 인구밀도가 낮으니 이런 도로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시내를 벗어나니 시골길이다. 포장이 잘 되어있고 한적하다. 길 안내기가 말하는 대로 유적지가 있다는 칠성하 주변에 도착해서 주민들에게 위치를 물었으나 같은 대답이 없다. 주민 한 분이 자기 차로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울퉁불퉁한 버드나무길을 돌고 돌아 한참 가서 평원의 섬처럼 숲이 우거진 곳에 버스를 세우니 봉림고성 유지다. 봉림고성 주변은 숲과 마을이었는데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마을을 이전하고 숲은 베어내 농경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흙으로 쌓은 성이다. 윗부분이 많이 무너졌으나 흔적이 뚜렷하고 인공으로 조성한 해자도 확연하나 물은 없고 나무만 무성하다. 치(雉)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어 이 토성이 우리 민족과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이 쌓은 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널찍한 평지가 있고 주변은 숲이어서 둘러보기가 쉽지 않다. 평지 여기저기에 토기 조각들이 보인다.

▲ 봉림고성 성벽흔적
▲ 봉림고성 성벽흔적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성은 중국 한(漢)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이다. 성은 9개 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제7구역이 중심이라고 한다. 제7구역은 정사각형이고 성벽이 높고 누각도 있고 규모가 커서 왕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성 전체 면적이 120만m²인 아주 큰 성이다.

칠성하 주변 유적 중에서 가장 기획이 잘된 도시 유적으로 평가하는데 이 지역 정치 집단 중심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집단의 구체적인 성격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관점에서 깊이 연구해볼 만한 과제다.

이 성은 중점유물보호단위로 중국 당국이 중시하는 유적이다. 고성에서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고, 석기 청동기 철기 도기 골기 등 1600여 점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행방은 알 수 없다.

봉림고성에서 현지 농부를 따라 포대산 유적지를 찾았다. 포대산은 봉림고성 보다 조금 남쪽칠성하 왼쪽에 있었다. 말이 산이지 평원에 조금 우뚝한 동산으로 면적은 제법 넓어 보인다. 평원에서 유일한 동산이니 뭔가 옛 유적이 있을 만한 곳이다.

중국 천문고고전문가 이세동 씨에 의하면 “봉림고성은 왕궁이고 포대산 유적은 제천단인데 왕궁이 북쪽에, 제천단이 남쪽에 위치한 형식이다. 이런 배치는 북경 자금성과 천단(天壇) 배치와 같은 것이다.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황궁이 북쪽에 있고, 하늘에 제사 지낸 천단은 황궁 남쪽에 위치한 것과 같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천단을 만주족 청나라가 세웠고, 이곳이 만주족과 그 선조들이 살던 지역이다.

어렵사리 포대산 유적에 도착했는데 철조망으로 막아 놓아서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먼 곳까지 왔는데 들어가 볼 수 없다니 허망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위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평평한 동산에 천제단이 있다고 되어 있다. 원래 이 산은 원뿔형이었는데 정상을 깎아 평평하게 고른 다음 제천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3층으로 제단을 조성했다. 여기에 더하여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7개 구덩이를 만들었다. 별들 방위 표시가 아주 정확하다고 한다. 여덟번째 구덩이도 만들었는데 북극성을 표상한 것이라고 한다. 제천단에 마련한 북두칠성 유적으로는 여기가 제일 크다고 한다. 볼 수 없어 정말 아쉽다.

사실 북두칠성은 우리 선도사상에서 큰 의미가 있다. 선도사상은 아득한 옛날 신시 배달국 개창 이념으로 궁극적으로 홍익인간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선도사상은 우리 인간을 하늘의 맑고 밝은 기(氣)를 받아 태어난 존재로 인식한다.

기를 생명의 본질로 본다. 하늘의 맑고 밝은 기를 받아 태어났으니 누구에게나 인간은 소중한 존재다. 맑고 밝은 기는 인간이 성장하면서 소진하고 탁한 기가 섞여 순수한 기의 충만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수련으로 하늘의 기를 받아 탁한 기를 정화하여 맑고 밝은 기를 충만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 성통(成通)한 사람이다.

성통한 사람은 성통하지 못한 사람이 성통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 단계가 공완(功完)이다. 성통하고 공완하는 수련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즉 공생(共生)의 구현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생명이 다하면 기(氣)는 하늘로 돌아가는데 이를 조천(朝天)이라 한다. 조천의 귀착점을 북두칠성이라고 인식하기에 북두칠성은 한국선도의 완성점이다.

선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포대산 칠성단이 소중한 역사적 유적이다. 아마도 이 칠성단이 한국선도와 관련이 있어서 출입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포대산을 떠나 동북 방향으로 요하현으로 향했다. 물을 댈 수 있는 곳은 모두 논이다. 모내기가 거의 막바지인 것 같다. 버드나무 가로수 길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된다. 게다가 흐린 날씨다. 완달산맥을 넘는 길이다.

말이 산맥이지 우리나라 웬만한 고개 정도다. 산맥 입구에 도착하니 공사판이다. 길을 막고 돌아가라고 한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완달산맥 기슭 길 100km 정도를 돌아가야 한다.

삼강평원은 제주도처럼 흙이 검다. 화산 분출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 문화를 흑토(黑土)문화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돌아가는 길 주변 흙은 검은색이 옅은 것 같다. 백두산에서 멀어지기 때문인가?

오후 5시쯤 소남산(小南山)에 면한 요하현에 도착했다. 산 입구에 박물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우수리강이 흐른다. 우수리강 동쪽은 러시아다. 우수리강은 만주에서 제일 큰 호수 흥개호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흑룡강과 합류한다.

1860년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북경조약으로 중국과 러시아 국경이 되었다. 예약한 탓으로 박물관 관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물관은 소남산 출토 유물, 요하현 혁명열사 사적, 혁철족(赫哲族)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소남산 출토 유물 진품은 박물관에 없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옥기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이 사진 진품은 대부분 흑룡강성 박물관에서 보았다.

다음 사진은 소남산 출토 옥 칼이다. 옥을 갈아 이렇게 만드는데는 공력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 옥을 다듬어 만든 칼
▲ 옥을 다듬어 만든 칼

지금 요하현 인구는 10만이 조금 넘는다. 대일항전기 우리 동포가 2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혁명열사 사적 전시실에는 걸출한 6명 혁명 열사 사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중 두 분이 우리 동포다. 박진우와 최석천인데 초기 대일 유격대 대장으로 활약한 사람들이다. 두 분 모두 이북 출신인데 박진우 대장은 뒤에 동북항일연군 제4군 부사령관에 올랐고 20대 말에 전사했다. 최석천 대장은 북한 정권 수립 후 부주석까지 올랐던 최용건이다. 이들의 대일 유격전은 이념을 떠나 독립전쟁이었을 것이다.

▲ 물고기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은 혁철족 남녀
▲ 물고기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은 혁철족 남녀

혁철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소수민족이다. 약 5000명이라고 한다. 이곳이 혁철족 자치 마을이다. 박물관은 이들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데 정교한 가면이 눈에 확 띈다.

고양 중남미박물관에 본 남미 인디안 가면과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혁철족 생업이 수렵과 어업인데 아마도 주업은 어업이었던가 보다. 박물관에 생선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은 남녀를 전시하고 있는데 생소하지만 괜찮아 보인다.

▲ 혁철족 가면 일부
▲ 혁철족 가면 일부

박물관을 나와 길 건너 우수리강으로 갔다. 만주에서 제일 큰 호수 흥개호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흑룡강과 합류하는 강이다. 강 중간에 섬이 있어 두 줄기 강이 합류하여 흐른다. 강폭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주변이 잘 정비되어 있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수리강 동쪽은 러시아고 서쪽이 중국이다. 1860년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북경조약에서 정한 국경이다. 물이 깨끗하다. 여기저기 다슬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일급수임을 알겠다.

송화강에서 보았던 말조개도 보인다. 서울보다 위도가 높아 온도가 조금 낮고 강바람도 상쾌하다. 혹한이 몰아치는 겨울이 아니라면 정말 살기 좋은 고장일 것 같다.

▲ 우수리강, 멀리 보이는 육지가 러시아
▲ 우수리강, 멀리 보이는 육지가 러시아

혁철족 생선요리 전수 전문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생선과 채소가 푸짐하게 나왔다. 채소는 너무 좋았다. 생선요리는 맛은 있는데 간이 맞지 않았다. 한국 사람 입 맞 맞추기가 쉬운 노릇인가. 더구나 이 지역에 오는 한국 사람이 아주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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