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이 날조한 ‘전라도천년사’에도 한사군 재평양설 망령이 깔려있다.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송호정, ‘고조선은 국가 형성과 동시에 망해버려’

‘한사군 망했어도 한국사에 결정적인 영향 끼쳐’

한사군은 강단주류사학자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

한사군 재평양설 붕괴시, 강단이론 먼지처럼 소멸

안정준, 북한 주장 날조하여 대국민 사기극 벌여

 

<전라도천년사>,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8

▲ 송호정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을 북한일대로 그리고 있다.
▲ 송호정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을 북한일대로 그리고 있다.

"국가 형성과 동시에 망해버린 고조선은 앞의 '지도 2-1'에서 보이는 것처럼 평양 근처에 있었던 작은 나라였고, 그 자리에는 '지도 2-2'에 보이는 것처럼 고조선을 정복한 한나라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그중 평양에 설치된 낙랑군은 차후 400년간 지속되어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며 이후 한반도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송호정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한사군' 문제는 주류강단사학자들에게는 거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합니다.

역사학자가 아닌 한 시민으로서, 주류강단사학에 대한 비판서를 써낸 김상태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주류 고대사학계가 가진 모든 이론적 논증 구조의 핵심은 한사군이다.

이것은 일제시대 일본인 관변사학자들이 만든 전통으로서 그 일본 식민사학과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철의 법칙이다."

"한사군의 위치를 기준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위치를 비정하고 한사군이 존재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시기를 비정한다.

고조선이 미개한 부락집단으로 전락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이들의 위치를 기준으로 만리장성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지어 이들의 위치와 연대를 기준으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까지 마음대로 뜯어고친다.

기타 어떤 사료도 한사군의 기준에 안 맞으면 틀렸다고 한다."

"만일 한사군이 한반도 내부에 있었다는 이론이 무너지면, 한반도 내부의 한사군을 전제로 한 기존의 신라사, 백제사, 가야사 전체도 무너질 뿐만 아니라, 이병도, 이기백, 김정배, 노태돈, 송호정으로 이어지는 해방 이후 70년간의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고대사 이론 전체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다."(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 김상태는 한사군 재평양설이 무너지면 강단주류사학계의 이론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 김상태는 한사군 재평양설이 무너지면 강단주류사학계의 이론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지금 전문가가 아닌 한 시민의 저술을 언급하는 것은 '역사 주권'을 주장하는 시민들의 역사 인식 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평양에 설치된 낙랑군은 차후 400년간 지속되어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며 이후 한반도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송호정의 언급처럼, <전라도천년사>에도 한사군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곳에 한사군의 영향이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전라도천년사>에는 한사군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더라도 여기에서 깊이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상태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사군 문제는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철의 법칙이자, 해방 이후 70년간의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고대사 이론 전체가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주류강단사학자들이 윤내현이 등장하기 전에는 별로 신경도 안 쓰던 고조선사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실제 이유도 사실은 한사군 때문일 것이라는 게 김상태의 주장입니다.

주류강단사학계가 윤내현을 따돌리며 심지어 역사학자로 역사 문헌을 포기하면서까지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사군이 평양 근처에 있었다는 주류강단사학계의 일치된 주장에 맞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연구는 매우 많습니다.

필자가 읽어 본 저술만 하더라도 여러 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류강단사학계는 이런 주장들에 전혀 대응하지 않고 아예 무시하거나, '무서운 아이들'처럼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비난해 버리면 끝입니다.

자기들 주장만이 '학문'의 틀을 갖춘 역사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한국 고대 사학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주류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아예 운동장에 들어갈 수도 없지요.

그런데 주류강단사학계는 이른바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소장 학자들까지 나서서 낙랑군은 평양 근처에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무서운 아이들' 중 한 명은 조선 시대 실학자들도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면서 맹공을 퍼붓고 있습니다.

특히 안정준은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 "일제 시기에 발굴한 낙랑 지역 고분의 수는 70여 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 고분의 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00여 기에 달한다."면서, 마치 북한학계가 평양 일대를 낙랑군 지역으로 확정한 것처럼 설명합니다.

필자 역시 '아,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북한학계가 발굴한 결과가 그렇다면 맞는 말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출판한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를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연구 결과는 안정준이 이야기한 내용과 정반대였습니다.

북한학자들이 발굴 정리한 낙랑 무덤들은 한식(漢式) 유적 유물이 아니라, 고조선 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락랑국의 유적과 유물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에게 한사군 문제 특히 낙랑군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주류강단사학계 역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평양 근처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할 정도로 한사군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이 문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송호정은 고조선을 북한 평양 중심의 소국으로 보았다.
▲ 송호정은 고조선을 북한 평양 중심의 소국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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