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왜 매국노들이 이제는 대통령까지 올라 왜구에게 나라를 넘기도 있다.

 

글: 민인홍(대종교 전리)

왈우 강우규 의사, 조선총독 사이토 서울역서 폭살저격

‘자나 깨나 청년교육, 청년 가슴에 충격주려 거사 실행’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이 강우규 의사 체포, 고문 가해

독립투사 고문, 일제에 인정받아, 중추원 참의 까지 해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서 온갖 반민족 범죄 전면 부인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 이후 석방돼 행적 오리무중

▲ 서울역 앞에 세워진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서기1919.09.02. 신임 조선총독이 부임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율역으로 가 서울역에서 내려 마차에 타려는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자료: KBS역사저널(20191121방송) 발췌
▲ 서울역 앞에 세워진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서기1919.09.02. 신임 조선총독이 부임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율역으로 가 서울역에서 내려 마차에 타려는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자료: KBS역사저널(20191121방송) 발췌

104년 전 오늘, 왈우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가 있던 날이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강우규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일을 맞아 또 한 번 기억해야 할 이름은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 입니다.

재판장 : 피고가 사법계에 있을 때 사상범을 취급한 사실이 있지?

피고 : 절대로 없습니다.

재판장 : 기미 만세운동 당시 학생 사건을 취급하였다지?

피고 : 아닙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나는 한갓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 : 그러나 조선사람으로서 일인에게 피고가 보고하여야만 되지 않았나?

피고 : 그것은 저 혼자 한 일은 없습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일본말로 말하자면 고쓰가희(小使)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민족 분자로 체포·기소된 피고 김태석과 재판장 노진설 사이에 있었던 제1회 공판 사실심리의 일부이다. 김태석은 기소된 자신의 범죄를 전면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3·1 독립 만세운동 당시 자신도 만세를 불렀으며, 독립운동자를 구해 낸 애국자라고 떠들어대었다.

이날 공판정은 김태석의 철면피 같은 태도에 대한 분노와 허위 대답에 대한 어이없는 폭소로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김태석의 완강한 부인은 공판 기간 내내 계속되어 김태석 공판은 반민족행위자 공판 중 가장 애를 먹인 공판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창씨개명한 김태석의 일본 이름은 '가네무라'이다.

그는 1883년 평안남도 양덕에서 출생,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관립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3월에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한때 평양 공립보통학교 교원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야간부 법과 2년을 수료했다.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김태석도 엘리트였다. 귀국 후 다시 충남 공립보통학교, 평양 공립보통학교 교원을 하던 중 1912년 9월에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전출되어 경찰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후 김태석은 함북 웅기경찰서, 평안남도 관량만경찰서 · 평양경찰서 등을 옮겨 다니면서 근무하다가, 1918년 3월 경무부 총감부 고등경찰과로 전직하였는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반민족 범죄 이력을 작성하게 되었다.

1919년 8월 경찰관 제도 변경으로 경기도 고등경찰과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1923년 8월 경시로 승진되어 경기도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그해 12월 퇴직함으로써 경찰계를 떠났다.

1년여 공백 기간을 거친 뒤 1924년 12월 경기도 가평군수로 출발, 연천·부천군수를 거쳐 함경남도 참여관을 지냈다.

1938년 6월에는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었다가 1940년 9월 참여관 직을 사임하였는데, 이때 일본 정부로부터 친일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 4위 훈4등을 받았다.

이후 그는 친일 원로로서 국민총력조선연맹(1940년 결성)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1941년 결성) 평의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충실한 친일행각이 인정되어 1944년 6월에는 친일파들의 최고 명예직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화려한 친일 이력은 끝을 맺는다(그는 또한 조선광업진흥회사 상임감사를 한 바도 있다).

김태석은 반민법 위반자로 기소되었는데 기소내용은 주로 경찰 재직 시에 저지른 반민족 범죄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만큼 친일경찰로서 재직할 때 그가 저지른 반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인 죄악은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기소장에서 나타난 범죄행위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피의자 김태석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무 재직 시, 1919년 9월 17일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17번지 임재상의 방에서, 같은 해 9월 1일 경성역전에서 신임하여 오는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투탄하였던 강우규 선생을 체포하여 사형케 하고, 그 사건의 연루자인 허형, 최자남, 오태영 등 조선 독립운동자를 검거·투옥케함을 위시하여,

2. 피고 김태석은 1920년 7월 20일, 김태석의 밀정 김진규를 이용하여 밀양 폭탄 사건의 선동자인 이성우, 동 윤소룡을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곽경을 통하여 김병환 집에 폭탄 2개를 임치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급격 수사한 결과, 동 폭탄을 발견하여 당시 피의자에게 혹독한 고문과 잔인한 수단으로써 취조를 단행하여 사건 성립에 많은 공을 남기고,

3. 피의자 김태석은 1921년 10월 말경 김태석의 밀정 김인규의 보고에 의하여 조국광복운동자 단체인 조선의용단 사건 주동자인 김휘중을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모 하숙집에서 체포·취조한 결과 그 연루자인 황정연을 검거하였으며,

4. 피고인 김태석은 1915년 세칭 일심사(一心社) 사건에 있어서, 김태석은 평양 경찰의 근무임에도 불구하고 서장의 특명으로 동 사건의 일부를 취급하여 결과적으로 사건에 도움을 주었으며,

5. 피고인 김태석은 1938년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임명되어 당시 지원병 모병시험과를 겸무하면서 출병케 한 자이며, 애국청년 15명을 출병케 한 자이다.

6. 피고인 김태석은 반민족행위 규칙의 발표를 보아 자기 친우인 이원찬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분자이다(「곽상훈 검찰관의 기소문」).

친일경찰 특히 고등계 형사에게는 '고문왕', '고문귀'(拷問鬼), '악의 화신', '귀경부'(鬼警部), '친일귀' 등등의 별칭이 주어졌는데, 그만큼 이들이 동족에 대해 악랄했으며 갖은 고문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거나 불구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노덕술, 김태석, 하판락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수급(首級)에 오르는 최고의 반역자'들이었다.

이것은 특히 김태석의 반민족 범죄행위에서 잘 드러난다.

▲ 왈우 강우규 의사. 65세의 나이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폭살 저격하였다(편집인 주)
▲ 왈우 강우규 의사. 65세의 나이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폭살 저격하였다(편집인 주)

 

김태석의 죄상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앞의 기소문에 언급된 바 있듯이, 강우규 의사를 체포하여 사형받게 한 것이었다. 142년 전, 오늘이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한 날이다.

1919년 8월 5일 노령(露領)의 독립운동단체인 노인동맹 단을 대표하여 일본 총독을 폭살할 것을 계획하고 서울에 도착한 강우규는 때마침 9월 2일 신임총독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거사에 착수했다.

거사 당일 용산역은 '허형', 서울역은 '강우규'가 맡았다. 결국, 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총독에게 강우규는 폭탄을 던졌으나 총독의 혁대에 파편이 박혔을 뿐 총독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거사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경성특파원 다치바나, 일경 쓰에히로 등 2명이 죽고, 37명이 부상당했다.

이 당시 김태석은 경기도 경부로서 현장 경비를 하다가 강우규가 폭탄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강우규의 체포에 전력을 다하여 9월 17일 누하동 17번지 임재상의 집에서 그를 체포하고, 청진동 이화여관에서 허형을 체포함으로써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피의자를 취조하는 데 있어 김태석의 고문은 유명하지만, 특히나 밀양 폭탄 사건의 피의자 15명에 대한 그의 고문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이 밀양 폭탄 사건은 의열단이 조직된 후 처음으로 벌인 거사였는데, 당시의 피의자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온갖 고문, 악형을 받았다"(『약산과 의열단』, 백양당, 1947)고 기술하고 있다.

1949년 5월 20일 김태석의 제3회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홍종린은 법정에서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밀양 폭탄사건 당시 학생이던 나의 동지 윤필환 이하 15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극형을 하였고, 나중에는 죽게까지 한 자가 바로 이 자다"라고 증언하였다.

다음은 제1회 공판 법정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인데, 고문의 실상과 범행을 부인하는 김태석의 뻔뻔스러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때 김태석은 여전히 그런 사실이 없다고 외쳤다. 그러나 곽 검찰관은 또 한 가지의 사실을 예로 들었다.

그것은 곽상훈 검찰관 자신과 함께 같은 형무소에서 복역을 하였던 황삼규(黃三奎) 동지가 감옥에서 출옥하여 자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김태석이라는 놈 때문에 폐병에 걸리고 이렇게 폐인이 되었으니 그놈의 원수는 죽어서라도 갚아야 할 것이다. 특히 나는 경찰서에서 고 강우규 의사가 그놈한테 고문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맞았는지 혀가 세 치나 빠져나온 것을 보았으니 이야말로 천인공노할 죄상이 아닌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곽 검찰관은 이 두 가지 증언을 보더라도 피고인의 죄상은 역력하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니, 당황한 빛으로 두 손을 흔들면서 재판장을 바라보며 절대로 그런 사실이 없노라고 뻔뻔스럽게 최후까지 부인하였다. (『반민자 대공판기』, 한풍출판사, 1949)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활동에 들어가게 되자, 김태석은 밀항선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피하려 했다.

그러나 친구에게 알선을 부탁하는 서신이 발각되어 반민특위에 압수되었고, 김태석은 1949년 1월 13일 오후 11시쯤 신당동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제3회 공판에서 곽상훈 검찰관은 준엄한 논고와 아울러 "피고는 민족 앞에 자기 죄를 자책하며 개전할 의사는 추호도 없고 오히려 자기 죄를 은폐하는 자다"라면서 반민자 최초로 사형을 구형하였다.

사형 구형에 이어 오숭은 변호인의 변론이 있었는데, 과잉 변론과 반민자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변론이 중단되었으며, 오숭은 역시 5월 23일 반민법 제7조 위반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제4회 공판의 최후진술에서 그는 "나는 원래 마땅히 체포될 줄 알았으며, 따라서 자수하려 하였지만, 이왕 체포된 것이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체포되면 반민법정에서 사과하려고 생각하였으므로 어떠한 처벌이라도 재판관의 판결을 감수하겠다"라는 말을 하는 등 이전과는 달리 대죄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진심으로 뉘우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형량을 가볍게 해보려는 교활한 변신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6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제5회 공판이 개정되자 노진설 재판장은 바로 판결선언을 한 다음 "피고인은 자기 영리를 취하여 포악무도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호응·진력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자에 막대한 방해를 가하였으니 피고인의 죄상은 중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는 요지의 죄상이유를 낭독한 다음 반민법 제3조 및 제4조에 의하여 무기징역과 50만 원 재산몰수를 부과하는 언도를 내림으로써 말썽 많던 김태석의 공판을 끝냈다.

그 후 김태석은 다른 모든 민족반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심청구 끝에 감형되어 1950년 봄에 석방됨으로써 무기징역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후 김태석은 행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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