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한국식 자주민주주의 싹을 자르고 극우 독재체제를 심었다.

 

글: 지승룡( 민들레영토 대표, 목사)

 

한국 현대사의 잊혀진 예술가들 김순남, 임화, 김현경

임화의 시로 만든‘인민항쟁가’, 북한은 애국가처럼 불러

김순남은 북으로 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음악 활동 이어

미 군정의 학정과 탐학으로 대구 10월 항쟁발발 전국확산

미 군정 실시 여론조사, 사회주의 7할, 여운형 제일 원해

미 군정 한국에 민중 억압적 체제, 일본에는 민중 친화적

이여성은 일제 치하, 해방공간서 치열한 자주독립 투쟁

▲ 김순남의 외동 딸 김세원
▲ 김순남의 외동 딸 김세원

작곡가 김순남은 남에 남겨둔 외딸 방송인 김세원을 애련하게 그리워하며 ‘자장가’를 작곡한다. 월북한 피아니스트의 딸이란 꼬리표가 늘 붙은 김세원은 아버지가 해금되자 각국을 다니며 아버지 지인들을 만나고 자료를 모아 ‘나의 아버지 김순남’을 간행했다.

'그때를 아십니까’ 와 ‘한 끼 줍쇼’ 등 설명으로 친숙한 김세원 목소리를 ‘밤의 플랫폼’과 ‘영화음악실’을 통해서 감성으로 난 기억한다. 김순남과 김현경 (남편 김수영)은 6촌 남매로 뜻을 나누는 인생의 벗이었다.

백남준은 김순남을 이렇게 말했다. “작곡가는 한 나라에서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데, 우리는 김순남이 있었는데 나오려다 말았다” 수많은 세계 음악가들은 김순남의 작곡에 놀랐고 버클리 음대도 특별 장학생으로 초대했다.

김순남의 돈암동 집에는 음악인만이 아니라 김수영, 임화, 오장환, 김남천, 이태준, 안회남, 함세덕 등을 비롯한 카프멤버들이 모였고 이들은 명동에 모여 스스로 위로했고 카프가 있던 종각 한창 빌딩에서는 참여예술인으로 의미가 있고 행동했다.

카프는 시국에 대한 깊은 토론과 대안을 제시하고 시를 낭송되고 김순남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해방 전선이었다. 가난하고 어두운 시대이지만 사상의 세례를 받았고 소수자란 고독에 흔들림 없이 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 작곡가 김순남
▲ 작곡가 김순남

 

<고우림과 김연아, 임화와 지하련>

1940년대 명동은 미남평론가이며 사회주의에 몰방한 임화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마산 부자집 딸 미녀 소설가인 지하련과의 연애는 화제 중심이었다.

김수영 아내 김현경의 말을 빌리면 당시 최고의 미남 배우 수준으로 임화를 여성들이 좋아했고 남자들은 그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김순남은 한국 최초로 피아노협주곡을 썼고 그가 임화의 시로 만든 노래 ‘인민 항쟁가’는 북한에서 한동안 애국가처럼 불렸다.

김현경은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뒤 명동에서 술만 취하면 ‘인민 항쟁가’를 불러 고은 시인이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소리를 내고 연설을 해서 주변 사람들이 김수영의 생각을 듣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순남이 김소월과 오장환 등의 시로 만든 가곡 <산유화> <진달래꽃> <상렬> 등은 48년 월북 전까지 남한에서 민족 정서가 깃든 대중 가곡의 표본으로 평가받았다.

김순남은 북에 가서 50년대 초 조선소 주물노동자로 일도 하며 음악 활동을 하다 8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월북 작가들이 북에서 숙청되었다는 보도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김세원은 부친 곡 중 좋아하는 곡을 묻자 “상렬이나 초혼, 진달래꽃이죠. 제가 음악방송 진행을 40년 했는데 (아버지 곡이) 기가 막혀요. 아버지 음악을 세상에 더 알리고 싶어요. 아버지 음악을 교과서에 싣는 것이 꿈입니다.”

그는 빛을 보지 못한 부친의 음악이 北에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헝가리 국립문서 보관소에서 찾은 1952년 아버지 사진을 저한테 선물한 초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북 대사 겸임)한테도 북에 가면 아버지 곡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 시인이며 평론가 김화
▲ 시인이며 평론가 김화

 

<1947년 8월 미 군청청은 좌익활동금지만이 아니라 좌익사상을 가진 자도 검거하라! 고 시행한다>

월북 작가들이 40년대 말에 월북은 자기 의지라기보다는 미 군정청의 압박 때문이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은 미 군정의 실정과 학정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함으로써 촉발되었다.

경북 성주, 칠곡, 영천, 경남 통영, 진주, 마산으로 퍼졌고 충청, 전남, 전북, 경기, 강원, 황해도 등 남한 전역으로 퍼졌다.

도시에서는 식량 배급 시행, 농촌에서는 소작료 3·7제 실시,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등을 요구하고 도농이 공통으로 친일파 처단, 권력의 인민위원회 이양을 요구했다.

<46년 여론조사는 미군 청을 당혹하게 했다>

미군 ‘점령군’ 논란을 보며 생각난 자료다. 미 군정청 여론조사국이 1946년 7월에 실시한 ‘미래 한국 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다.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가 13%를 차지했다.

미 군정은 이 민심을 무력화하려고 광분했다. 대구 10월 인민봉기, 단독(반공)정부 수립, 제주 4.3항쟁, 여수항쟁, 코리아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자본주의, 나) 사회주의, 다) 공산주의

남조선 인민들의 답은 이러했다. (남조선 인민이란 말은 미 군정청이 사용한 말이었다) 자본주의 (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74명, 7%), 모른다(653명, 8%)였다.

또한, 남조선 인민들이 리더로 누구를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하였다.

이어 ①국제정세에 정통하고 ②조선 사정에 통달하고, ③가장 양심적이고 과학적이고 조직적이고 ④가장 정치적으로 포옹할 아량을 가진 정치인을 선택하라고 하였다.

이에 남조선 인민들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1,957매의 설문지를 배포하고 626매를 회수하여 집계 (설문지 회수율 32%)였다.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 홍남표 5%. 외 23명;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 허용 때문) 당시 남조선 인민들 대다수는 상당히 전략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민들은 남조선 토지는 국유화해서 친일파가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이런 새 나라의 과제를 미 군정청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해임시정부가 주축이 된 새 정부가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근 현대사 조선 민중들의 집단지성은 이렇게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여론으로 남조선이 가면 미국은 최대 인구를 지닌 아시아 시장에 진출 할 수 없고 심지어 일본까지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좌파나 중도가 아닌 확실한 우파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좌파지향적인 민중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친일 관료들과 고문과 수탈기술을 지닌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것이었다.

▲임화의 아내, 소설가 지하련
▲임화의 아내, 소설가 지하련

주목할 것은 해방 후 맥아더가 이끈 두 개의 미 군정 간의 차이이다. 즉 남한의 미 군정과 일본 미 군정의 차이다.

두 나라에서 친미적인 우익정권을 세운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내용상으로 기이한 역설을 우린 보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 전범 국가인 일본에선 민중 친화적인 '개혁'을 주도했다면, 정작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에는 민중 억압적인 극우체제로 몰고 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 군정은 일본에서는 일본이 다시 파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농지개혁, 재벌 해체, 노동조합 설치 등을 실시했다.

맥아더가 한국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 중의 하나가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일본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은 노동조합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 결과, 3만5000개의 노동조합이 생겨나 650만 명이 가입했고, 첫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해 첫 내각으로 사회당-민주당 연정이 출범했다.

그러나 남코리아에서는 보통 선거권을 주고 자유 민주주의의 기반을 제공했지만, 내용으로는 조선공산당과 같은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건국준비위원회 같은 중도좌파 온건 진보 세력도 공산주의 등으로 몰아 탄압하고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 정권을 만들었다.

한 정치학자는 "일본 민주주의는 미 군정의 산물"이라고 썼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일본 민주주의를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일본 민주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준 선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 해방 후 미 군정의 탄압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북으로 갔다. 6.25전쟁을 통해서도 민족지도자 급 인사들이 북으로 갔다.
▲ 해방 후 미 군정의 탄압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북으로 갔다. 6.25전쟁을 통해서도 민족지도자 급 인사들이 북으로 갔다.

 

이처럼 미국은 전범국인 일본에는 민주주의를, 전범 국가의 피해자인 우리에게는 극우 독재를 선물했다.

그 결과 미 군정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극우 정치에 의해 고통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 여파로 고통을 받고 있다.

나아가 미 군정의 종식과 함께 떠났던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 날아와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받아 우리 군을 지배하고 우리 땅에 항구적으로 주둔하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지금은 대구가 정치적으로 보수를 대변하는 지역이 되었지만 실은 대구에는 이여성, 이쾌대 형제처럼 진보적인 인사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이여성은 18세 때 김원봉과 김약수와 만주로 망명해 무장 독립운동을 했고 3.1운동 이후 귀국해서 대구에서 ‘혜성단’ 이란 무장단체를 만들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된다. 이후 이여성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조선 동아일보기자로 활동한 이여성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추진하면서 약소민족 운동에 대한 글을 올리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그는 강제 해직된다.

그는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하며 여운형의 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남조선 시민당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지만, 이승만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운형의 실제적 전략을 감당하는 역할을 맡는다.

여운형 암살 이후 이여성도 역시 구속되었고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여성은 그림과 인문학에 대하여 깊은 조예가 있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말하는 이쾌대는 이여성의 미술을 보고 화가가 되었다.

이여성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후 미술에 깊이 심취하며 조선의 미학을 이루는 노력을 다하는데 그때 신동아에 남긴 그의 말이 인상적이다.

“조선 예술가는 풀죽은 거동과 졸린 눈초리를 갖고 담배와 술 여인과 불규칙과 무절제로 보내는데 이런 것들과 싸울 굳은 결심을 하자. 조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예술을 지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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