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식민사학자들의 학문이라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준 것이다.

 

글: 민인홍(대종교 총본사 전리)

 

일제치하 동아일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활동 보도

가야를 삭제한 삼국시대로 구분, 이전은 역사로 보지 않아

방대한 조선사 자료 수집과 날조를 위해 20만명 동원도 부족

일왕의 충량한 제국의 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열도는 중앙, 조선은 지방으로 하여 일본제국의 지방사로 함

조선사편수회 참여한 최남선, 일제의 고조선 부정에 이의 제기

해방 후 일인 학자들, 국사편찬위를 조선사편수회 후신 취급

 

▲ 서기1925.10.13.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지휘 감독하는 조선사편수회 활동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 서기1925.10.13.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지휘 감독하는 조선사편수회 활동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1925년 10월 13일자 기사.

조선사는

7개 시대로 구분

완성은 20년 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제1회 회합은 지난 8일 개최되었다. 편수회의 목적은 조선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사료를 수집하여 완전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는 대규모의 사업이다. 그 구체적 계획안으로는 조선사의 체재, 문체, 사료 수집의 범위, 원고 작성 등으로 나누고 편년체 역사로는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편찬한다고 한다.

1. 삼국 이전

2. 삼국시대

3. 신라시대

4. 고려시대

5. 조선시대 전기

6. 조선시대 중기(광해군~영조까지)

7. 조선시대 후기(정조~갑오개혁까지)

체재는 우선 요약문을 게시하고 다음에 사료를 수록하기로 하였으므로 일반인은 그 요약문만 보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제1회 위원회는 오는 1933년까지 완성할 계획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즉

오는 1926년부터 1927년까지 2개년 간 사료의 수집을 완료하고 1928년 이후 1931년까지 4개년에 원고를 작성하여 1933년까지 수정을 마쳐 출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 각 도는 물론 일본 중국 각 방면에 퍼져 있는 관계 기록을 탐색하여 필사본을 만들기로 하였다. 필사본 작성만 해도 인원이 20만 명은 필요하리라고 한다.

1933년 이후의 이 조선사는 아주 광대한 분량이 될 것으로 책 수는 몇 백 권이 될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1915년 중추원을 중심으로 ‘조선반도사’ 편찬 사업을 시작했다. '조선반도사'는 통사(通史), 즉 한민족의 전체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책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충량한 제국신민에 부끄러움 없는 위치로 돕고 이끌기 위하여’라는 목적을 분명히 내세웠다.

역사 서술이 곧 식민지 통치수단의 하나가 된 꼴이다. 위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로 좁혀 놓으려는 의도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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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반도사는 흐지부지됐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 때문.

일제는 역사 조작을 통해 조선을 일본에 동화 시키기에는 한민족의 뿌리가 튼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선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거나 일본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 쉽사리 통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방향을 틀었다. 역사 서술에서 사료(史料) 수집으로.

1923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로 조직을 확대했다.

회장은 내내 정무총감이 맡았다. 이 해 10월 조선사편수회 제1회 회의를 열어 8년을 시한으로 ‘조선사’를 발간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 조선사 편수회 구성원들.
▲ 조선사 편수회 구성원들.

 

동아일보 10월 13일자 1면의 ‘朝鮮史는 七時代로 區分’은 이 첫 회의를 소개한 기사다.

일제가 ‘조선사’를 통사가 아니라 자료집 형태로 내겠다고 한 배경에는 능력 부족도 작용했다. 조선의 반만년 통사를 쓸 만한 일본 전문가가 부족했다. 당시엔 기껏해야 고대사나 일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조선 연구가 나오는데 불과했다.

조선사편수회를 지휘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고문서학의 권위자였다. 하지만 자료집 편찬의 바탕에는 한민족의 역사를 일본 밑에 영원히 묶어두려는 무서운 장치도 깔려 있었다.

마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권력이 지방영주를 복속시켜 나갔듯이 우리 역사도 일본제국의 하위부문으로 끼워 맞추는 틀을 만들려 했던 것. 일본은 중앙, 조선은 지방이라는 구도를 고정하기 위해 활용할 사료를 모아들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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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은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발해 같은 것도 조선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이십니까?"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편수회 제4회 회의에서 꺼낸 질문이다.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은 친일 행적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시작을 삼국시대 이후로 잡으려는 시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말하자면 안에서 싸운 셈.

단군 연구의 대가인 최남선이었으니까 가능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는 연 월 일이 분명한 사실만 싣는다는 실증주의를 앞세워 고조선을 제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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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까지 ‘조선사’를 내겠다는 계획은 5년이 더 지난 1938년에야 35책으로 마무리됐다. 지방은 물론 일본 만주까지 가서 고문서 문집 영정 고지도 탁본 등을 사들였다.

고문서만 6만1500장에 가까운 분량이 수집됐다고 한다. 이렇게 펴낸 ‘조선사’는 해방 이후에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연구자들은 ‘조선사’를 밑그림으로 해서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고 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던 일본 연구자들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속기관쯤으로 볼 정도였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연구도 ‘조선사’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는 왜곡되면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분명한 교훈을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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