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서양인들을 기억해야 한다.

글: 지승룡(휴먼테라피 대표, 전 민들레영토대표, )

한글 ‘벗’ 글자는 찻잔과 한글 음절과 유관,

벗, 친구, 동무는 의미 같으나 동무는 불온시

해방 전 남북 다 40대 이하 벗을 동무로 불러

구한말 고종, 근대화 위해 외국인 3인 벗 초빙

육영공원서 헐버트, 벙커, 길모어 영어 가르쳐

고종, 조미수교 후 미국이 일본견제 줄 것 기대

미, 카츠라-테프트 밀약으로 조선 일본에 넘겨

헐버트, 조선독립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 추진

▲ 관립중학교(현 경기고)에서 수업하는 모습.
▲ 관립중학교(현 경기고)에서 수업하는 모습.

 

나는 한글의 한글(한 음절)을 즐겨 연구한다. 지난 글에 집이란 글은 눈감고 잠자는 얼굴 모양의 ㅈ과 음식을 담는 플레이트 ㅂ과 이것을 지켜주는 플랫폼 ㅣ이라 하였다.

오늘은 벗이다. 벗은 찻잔 플레이트 ㅂ과 손으로 잡은 ㅓ와 걷는 모양의 ㅅ으로 이루어졌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 동행, 걷는다는 것은 행동의 동행이다.

해방 전에 남북 다 40대 이하는 벗을 동무라고 했다. 인생 동선이 겹쳐서 마음과 같은 것이 동무들이었다. 더 세월이 흘러 장년 이상이 되어 사는 동선이 다르고 처지가 달라졌어도 서로를 살피고 인생을 나누는 벗은 친구로 불렀다.

물론 동무도 좋고 친구도 좋다. 북이 동무란 말을 쓴다고 남쪽 정부는 70년대 초 동무란 말을 금기시 한 어리석음은 없어야 한다. 고종과 조선인들의 벗이었다가 찐 친구로 남은 세 명의 서양인을 오늘 기억하고 싶다.

고종은 조미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기대를 많이 했다. 청과 일, 특히 일을 견제하는데 미국을 의지한 순진한 분이셨다. 고종은 영어를 잘하는 조선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세워 조선 관료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고 우수한 청년을 뽑아서 3년간 교육을 시켰고 교육장소는 지금 덕수궁 현대 미술관자리였다. 재정은 선박세를 받아서 운영했고 고종이 직접 교육평가에 참여 했다.

이들은 무료로 교육을 받았고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담뱃값으로 수시로 600전도 받았는데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2전 5리였다. 고종께서 학생들 담뱃값을 주었다는 것이 재미지다.

옛날 부모님들이 선생님들에게 담뱃값으로 드린 것이 이런 유래일 수도 있겠다.

그 담뱃값으로 나름 품위를 유지하며 일본을 능가하는 교육을 받는다는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 같다.

문제는 우수 교사였다. 고종은 주한 재미 공사에게 특별하게 부탁하여 영어와 서구과학을 가르쳐 줄 우수 교사 3명을 부탁하였고 헐버트, 벙커, 길모어가 오게 된다.

이들은 1886년에서 1894년까지 하루 6시간 수업을 세 사람이 두 시간씩 나누어 영어 문법 지리 수학 등을 가르쳤다.

우리에게 축복인지 이들은 온 힘을 다해 교사의 사명을 감당했고 여기서 수업받은 인물들은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교사가 되었다.

▲ 육영공원의 수업장면.
▲ 육영공원의 수업장면.

돈을 벌기 위해서 코리아로 온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의 코리아 사랑이 운명이 되어 한국 근대사에 선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헐버트는 드리마 ‘미스터션샤인’에 나오는 유진초이의 조언자로 나온 서양인이었다. 고종이 깊이 의지한 인물이었다. 헐버트는 러일전쟁을 보면서 일본제국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아편을 팔고 부동산을 매입하고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것을 잡지로 만들어 수십 차례 알린다.

카츠라 테프트 조약이후 미국이 조선의 독립에 관여하는 미국인이 되지 말라는 공문을 받자 헐버트는 분개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도 직접 서신을 보내 조선을 돕는데 조선의 민족과제를 외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헐버트는 1906년 6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고종에게 알리고 고종의 이름으로 특사를 보내 외교전을 펼치자고 제안한다.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그리고 헐버트도 가지만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들은 육영공원이 재정이 없어 폐교했어도 조선 공무원들의 교육기관 한성 관립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서울대 전신인 한성사범학교에서, 경기고 전신인 관립중학교에서 조선을 위한 영어와 고등 교육을 하였다.

이들이 만든 삼문(조선어 영어 중국어)출판사는 조선을 알리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67차례나 발행하였고 세계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조선의 독립정신을 알렸으니 돈을 벌려고 왔지만, 벗이 되고 친구가 되어 조선 땅에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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