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은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313년에 멸망하였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글: 전우성(역사저술가, 관세사)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연5군과 연관 돼

낙랑군은 처음부터 대륙에 있어 교치설 불성립

교치설 근거, 자치통감은 교치설과 상관없어

 

▲ 강단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이동설.
▲ 강단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이동설.

 

<기고문14>

[한사군과 낙랑군 교치설]

한사군 위치에 대한 논란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 논란은 그 시작이 잘못되었다. 즉 한사군 자체 위치 논란에서 시작되어 이것으로 끝난 잘못이 있다.

한사군의 위치는 이 이전에 설치되었다는 연5군 위치와 관련이 있고, 이 연5군은 당초 이 지역에 있었던 소위 전기 고조선이 이동하였다는 ‘고조선 이동설’과 관련이 있다. 즉 한사군은 사서 기록상 연5군의 이웃에 같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살펴 본 바대로 연5군은 산서성과 하북성 경계 지방 인근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조선 이동설’은 허위이거나 사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에 그치는 범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한사군과 한사군의 소속현인 낙랑군은 하북성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에는 한가지 변수가 있다. 바로 ‘낙랑군 교치설’이다. 즉 원래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는데 낙랑군이 망하고 나머지 잔당이 하북성으로 도주하니 이 인구를 모아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는 주장이다.

즉 대륙에 있는 낙랑군은 한나라 때 낙랑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한반도 평양지방에 낙랑군이 당초에 설치된 것을 전제하는데, 모든 사서 기록상에는 낙랑군이 하북성을 가리킨다. 평양의 낙랑군을 전제로 한 낙랑군 교치설은 설자리가 없다.

이를 입증한 사실을 열거하면,

- 모든 사서 기록상에 한사군과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연5군의 위치인 산서성과 하북성 경계 이웃인 하북성 지역에 있음이 확인된다.

- 한사군 및 낙랑군 자체 위치도 한반도 기록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확인이 안 된다.

-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옮기거나 원래 설치된 지역에서 없어지거나 다른 지역 즉 한반도에서 옮긴 기록이 전혀 확인이 안 된다.

- ‘낙랑군 교치설’의 절대적인 근거 사항인 낙랑군이 AD313년 한반도 평양지방에서 고구려에게 멸망되거나 축출되어 대륙으로 이동된 사실이 없다.

- 즉 서기313년 겨울 10월 기록은 단지 고구려가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명을 포로로 잡은 기록이 전부이지 멸망시키거나 축출한 기록이 아니다. 낙랑군이 멸망된 사실은 중요한 사건이므로 사서 기록에 있어야 하나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

- 더군다나 비록 『삼국사기』 상에는 이후 낙랑군 기록이 안보이나 중국사서 기록상에는 변함 없이 옮긴 기록이 없이 낙랑군이 그대로 존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 ‘낙랑군 교치설’의 근거가 되는 중국사서 기록상의 낙랑군이 새로 설치되는 기록인 서기 313년 여름4월조 기록인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 기록은 그 시기상 『삼국사기』 상의 겨울 10월과 맞지 않는다.

- 그리고 이 『자치통감』의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전연의 4대왕인 모용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는 기록은 이 사건에서 등장하는 왕준과 모용외와 관련된 인물들을 설명하는 문단으로써 이는 서기 313년 이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즉, 편년체 역사서의 경우 편년 기사의 배경이나 원인, 이미 발생한 관련된 사실을 편년기사에 부기하여, 편년기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관련사실을 통합하여 기술함으로써, 편년체 역사서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것에 의하여 당해 기록이 아닌 것을 첨가하는 것이기에 이 사건 기록은 당시인 서기313년 기록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기록은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한 기록이 아니라 기존의 낙랑군 내에서 권력 변화가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일 뿐이다.

설사 새로 설치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강력한 고구려가 지키고 있는 요령성 지방을 한반도 평양에서 천여가를 이끌고 통과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 평양에서 낙랑군이 망하고 요동응로 잔당 1천여가구가 탈출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허위 주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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