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이동설은 진한대의 고토회복으로 의미가 사라졌다.

글: 전우성(역사저술가, 관세사)

 

고조선 이동설 근거,

연 장군 진개의 고조선 침입 2천리와 연 5군 설치

산서성, 산동성 일대서 발생, 한반도 평양까지 아냐

사기 조선열전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이 다시 회복함

▲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 영토를 일부분 빼앗고 설치했다는 연5군 위치도.
▲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 영토를 일부분 빼앗고 설치했다는 연5군 위치도.

 

<기고문13>

[연5군과 고조선 이동설 규명]

연5군은 소위 후기 고조선 위치인 위만조선 위치와 직접 관련된다.

이는 결국 나중에 이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된 한나라 군현인 한사군인 낙랑군의 위치와도 연관된다. 따라서 이는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가의 관건이 된다.

즉, 낙랑군이 현재의 역사대로 한반도 평양에 있었는가 아니면 이를 비판하는 논리대로 대륙에 있었는가 여부의 판가름이 된다.

연5군은 원래의 고조선 위치에서 연나라 전성시 연나라 장수인 진개의 고조선 침입에 의하여 고조선을 이동시킨 후 이곳에 연5군이 설치된 것이므로 당연히 ‘고조선 이동설’이 그 근거가 된다.

그러나 ‘고조선 이동설’은 모든 사서 기록상 고조선의 위치가 대륙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 결과에 따라 설치된 연5군의 위치가 모두 대륙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사서 기록을 ‘낙랑군 평양설’ 논리에 맞추어 설정된 허위 논리임이 확인된다.

따라서 연5군의 위치도 이 ‘낙랑군 평양설’에 맞추어 한반도 인근인 압록강까지 설정된 사실은 역사왜곡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역사적 사실을 사서 기록에 의하여 명확히 확인 바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인 연나라 전성기인 연나라 소왕 시기(BC300~270년경)에 연나라 장군인 진개가 공격을 가한 것은 두 세력으로 확인된다.

그 하나는 동호족으로써 이는 사서 기록상 오환선비족인 것으로 『사기 흉노열전』 상에 명백히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선으로써 이는 같은 사서의 다른 편인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되어져 있다.

더군다나 『사기 흉노열전』에 기록되어져 있는 동호족인 오환선비족에 대한 공격 결과는 1000여리 물러가게 한 후 장성을 축조하고 연5군을 설치하였다.

반면에 『사기 조선열전』 기록은 고조선을 공격하여 일정한 지역으로 고조선을 물러나게 하여 새로 국경선을 형성하고 성과 요새를 축조한 것으로 나온다.

▲ 연5군 위치 비교도.
▲ 연5군 위치 비교도.

 

이는 다른 사서 기록에 의하여도 명백히 확인된다.

다만 이를 후대의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는 동호족에 대한 공격과 고조선에 대한 공격을 오로지 고조선에 대한 공격으로 합친 채, 물러난 거리도 2000여리로 합산해 기록하여 놨다.

이것을 우리 역사학계에서 여러 사서 기록을 종합하여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후대에 왜곡 기록된 이 사서 기록만을 받아들여 소위 ‘고조선 이동설’을 창작하였고 이를 ‘낙랑군 평양설’에 이용하였다.

따라서 ‘고조선 이동설‘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그 범위는 좁은 지역임과 동시에 이에 대한 관련 사서 전체를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이후 시기인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는 고조선은 원래의 위치를 회복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연5군 설치 지역과 관련한 모든 사서 기록을 확인한 결과에 의한 그 위치가 현재 설정하고 있는 하북성에서 요령성을 거쳐 한반도 북부 압록강에 이른 것이 아니라 산서성과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지방을 벗어나지 않는 것에 의하여도 명확히 확인된다.

따라서 이 연5군 동쪽에 설치한 것으로 확인되는 낙랑군의 위치에 의하여 이 낙랑군의 위치 또한 한반도가 아니라 하북성 서쪽 지역임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 고대 역사는 다시 고쳐 써야 한다.

다음에는 연5군 이후에 설치된 낙랑군의 위치와 낙랑군이 옮겨졌다는 ‘한사군과 낙랑군 교치설’에 대하여 확인해 보고자 한다. 

▲ 고조선 이동설 사서 기록 분석표
▲ 고조선 이동설 사서 기록 분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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