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의 교과서, 일본서기로 전라도를 창지개명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광주 호남연대, ‘전라도천년사’, 출판저지 학술대회 개최

창작소설인 일본서기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

‘전라도천년사’ 쓴 자들 일본서기로 전라도 역사 날조

백제의 마한 경략 통설은 창작, 2주갑설은 궤변에 불과

창작된 37명 왜왕의 『일본서기』, 『천년사』 근본적 ‘허구'

“『천년사』의 과제는 일본열도 백제역사 정립이 최우선”

▲ 반민족 식민사학 타도를 위한 호남지역의 역사의병들이 광주광역시 전일빌딩에서 학술발표회를 개최한다.
▲ 반민족 식민사학 타도를 위한 호남지역의 역사의병들이 광주광역시 전일빌딩에서 학술발표회를 개최한다.

서기2023.07.29. 저녁 19시. 전남 광주광역시 동구 전일빌딩에서 반민족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한 전라도천년사 출판 저지를 위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호남역사 바로세우기 국민연대가 주최하고 고봉학술원이 후원한다.

이날 주제발표는 경남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전직 검사인 이원희 변호사가 맡는다. 이 변호사는 발표를 통해서 일본서기가 창작된 위서임을 밝히고 이번에 문제된 반민족 식민사학자들이 쓴 전라도천년사에 주로 인용된 일본서기 신공황후 49조를 집중분석하여 허구성을 드러낼 예정이다.

또한 일본이라는 국가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 정상적인 국가로 나간 것이지 그 무슨 야마토왜시절부터 나라로 취급하여 백제 신라 가야와 대등한 교류를 하였다는 식의 반민족 식민사학계의 황당무개한 주장을 격파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이라는 이름이 백제를 아름답게 부르는 미칭임을 강조하여 열도는 670년 백제멸망 이후 일본으로 홀로서기 하기 전까지는 읍락 수준의 소규모 국가가 난립한 역사임을 밝힌다.

이 변호사가 발표할 원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반민족 식민사학 타도를 위한 핵심 무기라는 점에서 자주독립의 민주 깨시민이라면 숙지해야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반민족 식민사학 역도들에게 역사 사기를 당하며 정신적 노예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창작된 위서(僞書) 『일본서기』를 금과옥조로 여긴 『전라도천년사』

-『전라도천년사』 「고대편」을 읽고

이십년 가까운 세월동안 『일본서기』와 『고사기』, 『만엽집』 등을 통하여 일본 고대사와 고대 일본어를 공부하여 온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의 『전라도천년사』(이하 『천년사』) 고대편을 읽고는 깊은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일본서기』를 「엄중하게 비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금과옥조로 여기며 맹종’하였기 때문이다. 『천년사』의 중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일본에는 여러 도,부,현의 지자체가 주관하여 자기 지방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책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각각 1980년대 후반에 나온 『나라(奈良)현사』가 18권, 『오사카(大阪)시사』가 10권 분량이다. 이번에 3개 광역자치단체가 기획한 『천년사』 34권 발간은 참으로 획기적이고 대단한 발상이다.

『천년사』, 「임나일본부」 불신-「임나부흥회의」 신뢰는 모순

첫 번째의 문제는 바로 지명의 비정이다. 시민단체에서는 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지명으로 섣부르게 이곳저곳 비정하였냐고 주장한다.

반면 집필자측은 『일본서기』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신중하게 활용하여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 극히 제한적으로 참고하였다며 자신들의 비정은 정당하다고 반박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본서기』는 창작된 위서(僞書)로서, 거기에 나오는 내용은 99.99999%가 허구이고, 역사적 진실은 단 0.000001% 미만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다고 생각된다.『일본서기』보다 약간 앞서는 『고사기』 역시 마찬가지이고, 뒤에 나온 『풍토기』와 『신찬성씨록』은 이들 창작사서의 진실성을 보강하기 위하여 꾸며낸 책들이므로, 사료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적다.

『일본서기』에서 진실기사를 꼽는다면 곤지왕자와 후일의 동성왕과 무령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자, 아직기와 왕인 등의 학자, 관리, 승려, 기술자 등 백제 사람들의 도왜(渡倭), 한성 함락, 성왕의 전사, 소아씨(蘇我氏)의 전횡 기사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소수의 가야인, 고구려인과 신라인도 있다. 그 이외 거의 대부분의 『일본서기』 기사는 허구의 창작이다.

『고사기』에도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그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이지만, 물론 전편이 창작소설이다.

한국의 연구자들도 임나일본부는 믿지 않지만, 「임나부흥회의」는 믿고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부흥회의」라고 하여 놓고는 백제 성왕의 독백 비슷한 발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천황이 임나를 부흥하라고 지시하셨으니, 충성을 다하여 이루어내자”라는 식이다. 한자로 수천 글자나 되는데, 녹음이나 속기사가 없던 시절, 어찌 그렇게 상세하게 옮겨 적었는지 감탄할 따름이다.

임나일본부를 믿지 않는다면, 임나부흥회의도 부정하여야 마땅하다. 나아가 임나일본부를 둘러싼 개개의 여러 사건 또한 전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천년사』는 임나일본부는 부정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개별적인 사건은 실제 역사로 믿고는, 지명 비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비정이 역사적 진실과 부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백제의 마한 경략 통설은 창작, 2주갑설은 궤변

『천년사』에서 수없이 인용된 『일본서기』 신공 49년조 기사를 보자.

「49년 춘삼월, 荒田別,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정비하여 탁순국으로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같이 보냈다.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어서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고,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주었다.

이에 그 왕 초고와 왕자 귀수도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이때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네 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 목라근자 등이 의류촌에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다만 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①신공황후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창작된 가공인물

위 기사는 『일본서기』 신공왕후 49년조에 나온다. 그런데 우선 신공은 실존인물인가? 요즘 일본 대부분의 연구자들마저도 실존인물로 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그를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창작된 가공의 왕후인 것이 분명하다. 허구의 왕후를 기록한 기사 중의 하나인 이 기사의 신빙성은 이 사실만으로도 지극히 의심스럽다.

②기상천외한 연대를 서술한 『일본서기』 2주갑설 추종

위 기사는 『일본서기』의 기년으로는 서기 249년의 일이 된다. 그런데 『천년사』는 별다른 심각한 논의도 없이 120년을 인상하여 서기 369년, 즉 근초고왕 24년의 기사로 서술하고 있다.

『일본서기』가 역사적 사실을 120년이나 인하하여 기록하였으므로, 그만큼 올려 보아야 한다는 이론을 적용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서고금의 어느 역사서에도 없는 기상천외한 역사서술 방법이 된다. 어찌하여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120년이나 내린단 말인가?

그러면 과연 『일본서기』는 서기 369년에 실제 있었던 큰 전투를 120년 전인 신공 49년의 일이라고 기록하였을까?

만에 하나라도 『일본서기』의 찬자가 연대에 관한 착오를 일으켰을 가능성을 생각하여, 이 기사를 검토하여보자. 요약하면 이렇다.

「ⓐ탁국에 모여 신라 격파→ⓑ비자발, 남가라 등 7국 평정→ⓒ서쪽 고해진에 가서 침미다례 도륙, 백제 하사→ⓓ백제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 합세→ⓔ비리, 벽중 등 4읍 스스로 항복→ⓕ근초고왕의 항복 맹세」

이는 한국 역사학계의 확고부동한 통설인 백제의 마한 경략 기사이기도 하다. 즉 백제가 신라를 격파하고, 이어서 금관가야 등 가야의 7국을 평정하였으며, 마한의 여러 세력 또한 복속시켰다는 것이니 이는 엄청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신라, 남가라(금관가야) 등의 7개국을 평정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거니와, 당시의 정세로 보아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백한 창작기사이다. 또한 전성기의 근초고왕이 백제 땅에서 왜군에게 항복 맹세를 하였다는 것을 보라. 왜군은 백제와 연합군이다. 왜 갑자기 백제는 왜군에 항복하였을까?

또한 이 기사에는 피아의 병력수, 행군 경로, 주요 접전의 개요, 피아의 전과와 피해 등 전쟁 기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7세기 이전의 전쟁, 전투에 관한 모든 기사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이렇다. 지극히 기본적인 내용이 누락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도 유치한 창작기사인 것을 알 수 있다. 보이는 것은 장군의 이름인데, 그것도 왜인은 전부 가공인물이고, ‘목라근자’는 이 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기사는 전혀 믿기 어렵다.

③창작된 사건인데 지명 비정 진실 굳히기 어불성설

『천년사』는 위 기사 중 ▲침미다례 도륙과 ▲비리 등 4읍 항복은 진실된 기사로 믿고 지명 비정을 시도하고 있다. 전체가 창작인데, 어찌 이 부분만 진실이겠는가? 따라서 ‘침미다례’, ‘비리’ 등의 지명은 그것이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여기에 나오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전부 창작인데, 어떻게 지명 비정을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일본 연구자들의 이론처럼 120년을 인상하여 역사적 진실로 볼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다.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찬자가 붓끝의 희롱으로 꾸며낸 허구의 창작인 것이 명명백백하다.

④반파·기문 기록은 가공, 창작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 주리즉차 장군을 보내어, 穗積臣押山(포두미노어시야마)에 딸려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별도로 표문을 올려 아로되 “반파국이 신의 나라 땅인 ‘기문’을 빼앗아갔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을 내리시고 잘 판단하시어 본국으로 되돌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일본서기』 계체 7년 6월조)

앞뒤도 없이 ‘반파’가 백제의 ‘기문’을 빼앗아갔다고 하였다. ‘기문’이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보인다. 반파의 군대가 대군을 보내어 이 땅을 점거하였던 것인가? 그러면 기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하였단 말인가? 백제가 과연 왜왕에게 그 땅을 돌려주기를 원하였을까?

‘수적신압산’이 가공인물인 것은 물론이다. 아무리 보아도 유치한 창작이다. 기문과 반파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이어서 계체 7년 12월조에는 「왜 조정이 백제, 신라, 아라가야, 반파의 신하들이 도열한 자리에서 은칙을 내려, 기문과 대사를 백제에 주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한 국가의 영토를 마치 물건처럼 주고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참으로 유치하고 졸렬한 창작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백’, ‘개로’, ‘목라근자’, ‘주리즉차’ 등의 백제인 인명, 그리고 비자발, 비리, 기문, 반파 등의 지명, 이 또한 모두 창작의 산물일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실존 백제인이었고, 실재하였던 지명이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찬자는 실재하였던 백제의 사서를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실존 인명과 지명을 적당히 배치하여, 이 기사를 창작하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날조한 왜인과 사건들 사이사이에 진실된 백제의 인명, 지명을 적당히 섞어 배치함으로서, 창작물 냄새를 조금이라고 감추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실제 어느 시대에 어떤 일을 하였는지, 이러한 지명이 실제 어느 곳을 의미하는지, 어느 시대의 지명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천년사』의 모든 내용은 삭제하여야 마땅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료의 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할 창작 기사를 사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전라도의 고대사를 서술하기 위한 사료로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참으로 소략(疏略)하여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좀 더 풍성한 역사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자 측에서 『일본서기』를 이용하였다고 선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빈약하면 빈약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일 것이다. 창작소설집인 『일본서기』를 이용하는 것은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황국사관의 농간에 놀아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

창작된 37명 왜왕의 『일본서기』, 『천년사』 근본적 ‘허구’

①일본열도 백여 개 소국 난립, 가야·백제가 지배

필자는 5세기는 가야의 세력이, 6세기부터는 백제가 왜를 통치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우선 의문이 생기는 것은 일본의 국토는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두 배나 되고, 인구도 훨씬 많은데, 과연 가야와 백제가 왜를 지배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고대의 왜는 최소한 백 개 이상의 수많은 소국으로 분립된 상태였고, 7세기 초에도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 않았기에 가야와 백제가 얼마든지 진출하여 정복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다음은 478년 왜왕 무(武)가 송에 보낸 상표문의 일부이다.

「조부와 부친의 시대부터, 몸소 갑옷과 투구를 둘러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넜기에 편히 쉴 틈이 없었습니다.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여러 오랑캐 66국을 복속시켰으며, 북쪽 바다 건너 95국을 평정하였습니다」

모인은 현재의 아이누인의 선조로서, 그들은 단 하나의 국가를 세운 바도 없어 그들의 나라 55국은 허구이다. 북쪽 바다 건너 95국은 한국이 아니라 왜지에 존재하는데, 물론 95국은 심한 허풍이다. 그렇지만 이 내용으로 보면 이 무렵의 왜지에는 최소한 100개 이상의 소국이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왜왕이 통일전쟁에 분주하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방어 목적이 아니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적극적인 공격작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상표문을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증명하는 절호의 자료로 이용하였지만, 필자는 정반대로 백제가 왜를 지배한 자료로 본다.

②수나라 사신 왜 방문, 당시 일본열도 정확히 묘사

『수서』에 나오는 다음 대목은 608년, 수의 사신이 직접 왜를 방문하여 견문한 바를 기록하였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료이다.

「백제를 지나 죽도에 이르렀다. 남쪽으로 탐라국을 바라보며 도사마국을 지나, 넓은 대해 중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서 일지국, 죽사국에 다다랐다. 다시 동쪽으로 가 진왕국에 이르렀다…… 다시 10여국을 지나 해안에 도착하였다. 죽사국의 동쪽은 모두 왜국의 부용(附庸)이다」

북구주에는 여러 소국이 있었고, 또 10여국, 그리고 많은 왜국의 부용국, 이는 통일이 멀지않은 상태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608년에도 아직 통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고고학으로 보면, 4세기 말 이전까지의 왜는 아직 기마의 풍습도 없었고, 무당 혹은 제사장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무덤은 거대하였지만, 가장 중시된 부장품은 삼각연신수경이라는 청동거울이었고, 돌로 만든 팔찌, 쟁기 모양의 초형석 등 석제품이 주요한 부장품이었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보는 느낌이다. 사회의 발전단계가 한국보다 수 백 년 뒤쳐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데에다 수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니 가야에 이어서 백제가 진출하여 정복하였다 하여도 형세 상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③37대까지 창작된 왜왕, 38대부터 실존인물

『일본서기』에는 기원전 660년에 즉위하였다는 시조 신무부터, 687년에 즉위한 지통에 이르기까지 도합 40명의 왜왕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도 이 왜왕 모두를 실존인물로 보지는 않고 있다. 신무 이후 8대의 왜왕은 ‘결사팔대’라 하여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언제부터 진실된 왜왕이 존재하는가? 일본 학계에서는 이에 관하여 견해가 분분한데, 최근에는 최소한 17대 계체(즉위 506년)부터는 실존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앞서 본 『수서』에 의하면, 수의 사신이 608년 도왜한 기회에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왜왕은 분명히 남자왕이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의 왜왕은 여왕인 33대 추고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17대부터는 정상적인 실존 인물이었다가, 갑자기 33대에 가공인물이 나온 것이라는 볼 수는 없다. 37대까지 가공인물로 채워진 것이다. 이에 관한 상론은 생략한다. 만고의 성인이라는 성덕태자도 가공인물이고, 소아씨 일족 처단 이후 혁신조치였다는 ‘대화개신’도 허구이다.

백제 멸망 이후 668년에 즉위한 38대 천지부터 비로소 실존 인물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러면 왜 『일본서기』는 이렇듯 37명의 창작된 왜왕과 날조된 역사를 기록하였을까? 6세기 이후 왜는 백제의 속국이었으므로 그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왕실은 7세기부터 지금까지, 이름만 있고 성은 없는 특이한 가문인데, 이는 자신들의 출자를 숨기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일본서기』가 시조 신무부터 시작하여 37명의 왜왕을 창작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만일 왜 왕가의 시

조가 토착 왜인의 어떤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면, 그것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왜 왕실의 뿌리는 백제에 있었기에, 그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천년사』의 과제는 일본열도 백제역사 정립이 최우선”

『천년사』가 제대로 된 지역사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일본열도에 찬란하게 빛을 발한 백제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특히 6세기 이후 백제가 왜를 통치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 증거는 많지만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천년사』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칠지도에 담긴 진실 밝혀야 『천년사』 정립 가능

백제가 왜국으로 보낸 칠지도에서 전라도 천년 역사의 진실찾기 노력이 배가되어야 한다. 칠지도 명문에는 「백제 왕세자 ‘기(奇)’가 후왕인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취지로 적혀있다. 후왕은 대국에 종속하는 소국의 왕이다. 이 「후왕」이라는 두 글자에 한일 양국 고대사의 진실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先世 이래 이런 칼이 없었으니, 길이 후세에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외국의 왕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전혀 없고,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으로 일관하였으므로, 왜왕 ‘지’는 세자 ‘기’의 아우였다고 추정된다.

②왜왕 즉위식의 「파적검」·「호신검」은 백제 대왕의 하사품

7세기 무렵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즉위식에서 신임 천황에게 전수된 삼종신기 중 칼은 백제의 대왕이 하사한 「파적검」과 「호신검」이었다. 칼에는 명문이 있는데, 「경신년 백제에서 만들었다. 서른일곱번 단련한 칼이다. 남두육성과 북두칠성……」

천황 즉위식의 삼종신기가 백제에서 만든 칼이라니. 백제 대왕이 왜왕을 임명하던 시대의 전통이 중세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파적검은 일명 「삼공전투검」 혹은 「장군검」. 왜왕은 백제의 대왕에게 있어서는 「삼공(三公)」 즉 3명의 최고위 관료, 혹은 「장군」이었다.

③왜왕은 백제에서 파견한 왕자

『일본서기』에 의하면, 도합 11회에 걸쳐 12명,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1명의 백제 왕자가 도왜하였다 한다. 반면 왜 왕자가 백제로 건너간 것은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두 나라가 「교류」하는 사이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로 비슷한 정도로 방문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도합 13명의 백제 왕자 중 상당수는 왜왕이었다. 왕자 곤지, 후일의 전지왕과 동성왕, 무녕왕, 부여풍은 왜왕이었다고 추정된다.

무녕왕은 왜지의 외딴 섬 ‘각라도’에서 출생하였기에 섬을 뜻하는 일본어 ‘시마’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니다. 왜라는 섬나라에서 났기에 ‘시마’였다. 그는 왜 왕궁에서 편안하게 태어났던 것이 분명하다.

왕자 곤지는 『송서』의 왜왕 ‘흥(興)’이고, 왕자 말다(후일의 동성왕)는 왜왕 ‘무(武)’였다고 생각되며, 그 외 찬, 진, 제도 모두 백제에서 파견한 왜왕이었을 것이다.

외자의 한자로 된 이름들을 보라. 사신을 보내면서 그들의 성 ‘부여’씨를 생략하였는데, 아마도 왜왕이 백제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부여풍은 백제 멸망 무렵의 왜왕이었다. 그가 인질이었다면, 왜가 귀국하는 인질에게 전함 170척에 5천이나 되는 엄청난 대군을 호위병으로 붙여줄 리는 만무하다.

그후 그는 백강구에서 구원군 본진 2만7천 병력의 대함대를 총지휘한 바 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왜군을 거느리고 당군에 항복한 지휘관도 백제의 왕자 충승과 충지였다.

구원군 대병력의 최고지휘관은 부여풍, 부사령관은 두 왕자였다. 백제가 속국이었고, 부여풍이 인질이었다면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서 백제 구원의 대함대를 이끌고 항해하던 중, 현재의 시고쿠섬 에히매현의 니키타(熟田) 나루에서, 물때를 기다리며 지은 부여풍의 명시 한 수를 감상하여 보자.

「니키타 나루에서 배 타려고 달 기다렸더니, 물때도 맞았네, 이제는 노 저어 나아가자꾸나」

한시바삐 모국 백제로 돌아가, 적군의 발굽에 짓밟힌 나라를 되찾으려는 부여풍의 간절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부여풍의 두 아들이 『일본서기』의 38대 왜왕 천지, 39대 천무였다. 중세, 천황가에서 실질적인 시조로 받들어 모신 왕은 바로 이 천지였다.

시조 신무부터 37대 제명까지는 외면당하였다. 천황가에서는 그들이 창작된 가공인물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천황가는 부여풍의 직계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④국호 일본은 백제의 미칭, 백제는 종주국

백제 멸망 이후 새로이 제정된 국호 일본은 원래 백제의 미칭(美稱)이었다(백제 유민 예군의 묘지명). 왜가 종주국인 백제를 섬겼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천년사』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이다.

백제대궁과 백제대사의 사례도 그렇다. 수도 아스카의 왕궁 「백제대궁」과 왕립사찰 「백제대사」. 백제가 왜의 종주국이었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백제대사의 후신 「대관대사(大官大寺)」라는 이름은 익산의 왕궁리, 왕궁 내의 사찰 「대관사(大官寺)」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사카 등 5곳에도 「백제사」가 있었다.

⑤백제계통 지명, 인명, 문물 살펴야 비로소 『천년사』 정립

▲백제(百濟 구다라) : 백제원(百濟原), 백제야(百濟野), 백제천 등 ▲금래(今來 이마키) : 새로이 도래한 백제인들의 집단 주거지 ▲코오리(郡) : 백제의 지방행정단위인 「고을」 ▲~쿠라(倉) : 백제의 「~골」 ▲~시리(尻) : 골짜기를 의미하는 「~실」 ▲~토리(取 고대에는 ‘터리’) : 「들」 ▲마루야마(丸山) : 산「마루」 ▲백제의 「부여삼산」을 본뜬 아스카의 「대화(大和 야마토)삼산」 등은 백제와 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수 있는 지명들이다.

백제 계통의 인명의 경우도 그렇다. ~마로, ~다리, ~비, ~시, ~키 등 귀족들의 이름 뒤에 붙는 인칭접미사는 거의 백제풍이었다. 그들의 원적을 말하여 준다.

백제풍의 문물 사례를 보자.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6세기를 「금공품의 세기」라 부른다. 백제풍의 금 혹은 금동으로 된 귀고리, 목걸이, 큰 칼 등이 대유행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풍의 의복, 사원 건축, 불상 등 대부분의 문물이 백제풍이었다. 물론 고구려나 신라풍의 문물도 일부 있었다.

아울러 고위 귀족은 모두 백제인이었다. 소아(蘇我)씨, 물부(物部)씨, 대반(大伴)씨 등의 최고위 귀족은 모두 백제 후예들이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 『신찬성씨록』 은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여러 씨족의 시조를 창작한 바 있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상부나솔물부오(上部奈率物部烏)’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일본에서는 「왜계백제관료」 즉 왜인으로서 백제로 건너가 관직을 받은 사람으로 보지만, 속국 왜의 인물이 백제로 건너가 관리로 복무하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백제의 관리가 왜로 건너가(선대에 건너갔을 가능성이 큼) 복무한 것으로 보이므로, 「재왜백제관료」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⑥백제 멸망 이후에 비로소 「왜국」이 「일본」으로 독립

백제 멸망 이전의 왜는 정상적인 고대국가가 아니었다. 율령도 없었고, 정비된 관제와 행정관서, 백성의 호적, 고등교육기관, 국가의 역사서 등, 고대국가의 징표로 볼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관위제가 있었는데, 603년부터 시행된 바 있다.

그러다 백제 멸망 직후, 왜왕 천지가 율령(671년)을 비롯한 모든 제도를 새로이 시행하고 국호도 일본으로(670년) 바꾸었다. 필자는 이를 「천지의 대변혁」으로 명명한 바 있다. 왜 하필 백제 멸망 직후부터인가? 백제가 멸망하자 본의 아니게, 그때부터 고대국가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천년사』는 왜 칠지도를 비롯해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은 누락하고, 임나일본부의 지명은 어찌 그리 중시하였을까? 강단 사학자들이 이병도 이래의 전통, 그리고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타성적으로 답습한 결과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천년사』가 제대로 된 역사서의 틀을 갖춰 지역사로서 새로운 이정표가 되길 기대해본다.

■이원희(변호사)

■저서 : 일본열도의 백제어 / 천황가의 기원은 백제 부여씨 / 일본천황과 귀족의 백제어/속국 倭國에서 독립국 日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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