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은 통일신라 북쪽 강역을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그었다.

글: 전우성(역사저술가, 관세사)

 

대동강~원산만의 통일신라 국경선은 허구

아무리 축소하더라도 만주 일대까지 강역

니하를 경계로 통일신라, 발해 국경선 형성

니하, 산동성 북부이자 하북성 남부로 확인

▲ 통일신라와 발해 국경선.
▲ 통일신라와 발해 국경선.

 

[통일신라시대의 영역과 국경선]

현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성립된 소위 통일신라(남북국 시대의 신라, 여기서는 편의상 ‘통일신라’로 통칭)의 강역을 보면 서쪽의 평양의 대동강에서 동쪽 원산만에 이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모든 사서 기록을 확인하면 이는 잘못된 설정임이 명확히 확인된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조작해서 생긴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신라 북방한계선이 서쪽의 임진강 호로하로부터 동쪽으로 함경남도 덕원인 철관성까지로 날조하였다.

이후 신라 성덕왕34년, AD935년에 당나라가 패강 이남 땅인 평안남도 평양의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에게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고 이어 강역을 조금 북쪽으로 확장하여 결국 최종적으로 통일신라 서쪽의 평양의 대동강으로부터 동쪽의 원산만에 이르는 것으로 하였다.

서해안 임진강 인근에 설정한 호로하와 동해안 함경남도 덕원지방의 철관성은 신당 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뒤 발생한 신당 전쟁 최종 전투지라고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결국 통일신라의 북방 한계선를 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우선 2가지의 치명적인 역사적 사실 오류를 가지고 있다.

1). 신당 전쟁이 벌어진 전투지역은 조작된 한반도 내가 아니라 현재 주류 강단 사학계가 정한 위치라고 할지라도 한반도 북부 만주지방임이 확인된다. 따라서 그 주요 전투 지역중의 하나인 호로하와 철관성은 한반도 안이 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신당 전쟁의 원래 위치는 산동성이다. 이는 고구려 남쪽이자 신라의 북쪽의 형세를 이루는 곳이다. 이로 볼 때 신당 전쟁의 최종 전투지인 호로하와 철관성은 한반도 안이 될 수가 없다.

2).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현행 통일신라 북쪽 경계선은 당나라가 신라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설로 만들어 진 것으로써 잘못된 것이다.

당시 대동강 이북 지경은 현재의 주류 강단 사학계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이전인 AD698년에 이미 건국된 발해가 차지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당나라가 통일신라에게 하사해 주었다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사실이다.

이러한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 외에 호로하를 한반도 임진강으로 잘못 본 것이다. (1-1) 서쪽 경계인 호로하를 한반도 임진강으로 설정한 근거는 오로지 모든 설정을 한반도로 한 채, 호로하와 관련된 고구려의 남쪽 경계이자 신라의 북쪽 경계라는 사실과 호로하가 신라에서 고구려 평양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기록만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약 고구려의 남쪽 경계이자 신라의 북쪽 경계가 한반도가 아니고 원래의 위치인 산동성 지역이라면 이 호로하의 위치는 전혀 다른 곳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서 기록상의 이 평양은 그 위치상 중국사서가 산동성 고구려 졸본성을 평양성으로 착오 기록한 것이 확인되는 그 평양성이다.

(1-2)또한 동쪽 경계인 철관성의 경우에도 사서 기록상 안북하에 성 등을 쌓으면서 같이 쌓은 성이라는 기록 밖에 없는데, 이 안북하를 한반도 함경도 덕원에 위치한 것으로 설정한 것에 의하여 이 철관성 위치를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기의 안북하의 위치가 이곳이라는 그 어떤 근거가 없다.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의 산동성 위치에 의하면 이곳은 한반도가 될 수가 없다.

(2-1)그리고 두 번째 통일신라 북쪽 경계이자 최종적인 북방 한계선인 국경선으로 책정된 당나라의 패강 이남 신라 하사 내용은 그 어떤 사서 기록에서도 입증되지 않는 『삼국사기』상에만 기록된 것으로써 단지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유일한 기록인 『책부원귀』상에는 패강 이남 지역에 군사를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패강 이남의 땅을 당나라가 하사해 준 것 아니라 단지 군사를 주둔하게 한 것을 알리고 양해한 사항일 뿐이다.

(2-2)더군다나 패강의 원래 위치는 이 패강이 고구려 산동성 졸본성 남쪽을 흐르는 패수이자, 백제의 북쪽 경계였던 패하이자,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인 소해(小海)인 작은 바다인 패수, 패하, 패강인 것에 의하여 이 강은 이 패수, 패하가 고구려와 백제 경계지방을 거쳐 동쪽으로 흘러서 신라 지경에 오면 사서 기록강 패강으로 기록된 하천이다.

그러므로 이의 위치에 의하면 산동성 신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므로 당나라가 신라의 남쪽으로써 당나라와의 경계 지방에 가까운 하천인 관계로 인하여 이곳에 신라의 군사를 주둔함을 서로 양해를 한 것으로 확인된다.

사서 기록상 발해와 통일신라와의 경계는 이들 호로하나 철관성이나 패강이 아니라 니하(泥河)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 니하는 초기에 신라가 개척한 땅이자, 고구려 졸본성 가까이에 있으면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괴롭힌 말갈과 신라가 신라 초기부터 같이 활동한 하천으로써 당초 고구려 건국시 추모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건넌 동시에 백제 온조왕이 고구려를 출발하여 건넌 강인 대수인 지금의 산동성 마협하이다.

그러므로 이 니하를 경계로 한 발해와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바로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성 북부이자 하북성 남부 지방임이 확인된다. 또한 통일신라의 발해와의 또 다른 국경선은 요령성 요하로도 확인되어 결국 신라의 영역과 국경선은 지금의 산동성 니하와 요령성 요하로써 2개의 국경선으로 확인된다. 이에 의하여만 관련된 모든 역사적 기록과 맞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맞아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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