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 동서양을 주름잡던 거란의 대요는 고구려의 후예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거란족 대요 망하자 중앙아시아에서 키타이 세워

서양인에게 카라 키타이 거란은 공포 그 자체

샤먼박물관 앞 거란족 영광된 역사 새긴 조영물

필드하키 거란의 다우르족 막대기 공치기서 유래

샤먼문화박물관, 도록 보낸다고 해놓고 여태 감감

▲  만주 흑룡강성 샤만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란족 후예 다우르족 분포도.
▲ 만주 흑룡강성 샤만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란족 후예 다우르족 분포도.

 

샤먼 6

거란족은 야율아보기라는 영웅을 통해 916년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도 '거란'(契丹)이라 붙인다.

그러다 947년 '대요'(大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남송과 대치한 상태로 200여 년을 중국 북부와 만주를 통치하다 1125년 만주족에게 멸망한다.

그러나 거란족의 일부가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서 '카라 키타이' 한자로 흑요(黑遼)를 세운다.

카라 키타이는 매우 강력한 세력이어서 러시아는 이를 중국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서양은 최근까지도 중국을 키타이라 불렀다는데, 거란이 세운 카라 키타이를 중국이라고 착각한 때문이란다.

서양 사람들에게 카라 키타이는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에서는 젊은 징기스칸이 소부족을 거느리고 용병 노릇을 하며 금나라 변경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감히 만주를 토대로 중국대륙에서 웅비하고 있는 금나라와 아직은 대적하지 못한다.

거란가 중심에는 아담한 크기로 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거란을 세운 야율아보기의 큰 초상화가 우리를 맞이한다. 벽면에는 중국 북부와 만주를 제패하던 그들의 역사가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박물관에는 그들의 역사 뿐만 아니라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도 비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심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세워진 샤먼문화박물관은 조그마한 역사박물관과는 매우 달리 아주 거대하게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샤먼박물관 앞 들판에도 여러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고, 영광스러웠던 역사가 벽화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다우르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초원에서 막대기로 공을 치며 놀던 시합을 했다는데, 이 놀이가 필드하키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샤먼박물관 넓은 마당에 새겨진 동판 벽화에도 옛날 초원에서 막대기로 공을 치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문명의 가장 큰 징표의 하나인 '수레바퀴'를 거란족이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벽화에도 수레바퀴 모양은 반드시 나온다.

사실이라면 거란족은 인류문명사에 아주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샤먼박물관 지붕에는 거대한 샤먼상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근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만큼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샤먼문화박물관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샤먼 자료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우르족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바깥에 있던 모든 샤먼의 자료를 집대성해 놓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샤먼들이 입던 무복도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샤먼문화의 보고를 보는 듯하여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도록도 만들어 놓았다고 하여 사진은 대충대충 찍었는데, 마침 그날이 휴일이어서 도록을 판매하는 근무자가 출근하지 않아 도록을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김형관 PD는 도록과 우편 비용을 넉넉히 지불하고, 도록을 꼭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 도록은 오지 않았다.

나는 이윤선 교수에게 별도로 부탁하여 제자인 다우르족 학생에게 도록을 다시 보내오도록 하였으나, 아쉽게도 아직도 도록을 구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당시에 찍어온 사진만이라도 여기에 일부 올려놓으니 샤먼들의 무복이나 도구만이라도 살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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