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서와 중국사서는 대륙 신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글: 전우성(역사저술가, 관세사)

 

역사문헌의 기록 조각들을 조합해 보면 대륙신라 보여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선 유민의 조선은 대륙으로 봐야

신라의 대륙 소호금천씨 조상 삼은 것 대륙신라 단서

말갈의 신라 공격기록 한반도는 해석 불가, 대륙 가능

▲ 신라 건국 이동도.
▲ 신라 건국 이동도.

 

“고대국가 위치를 찾아서”

우리 고대역사는 왜곡되기도 하였고, 역사적 진실이 제대로 기록되지 있지 않다. 그러나 제대로 찾아보면 역사적 진실이 곳곳에 조각처럼 흩어져 있다. 이 흩어진 채 있는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제대로 우리 역사를 복원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러한 올바른 작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더욱 왜곡시켜 우리 역사를 혼미 속으로 빠뜨려 사실과 다른 거짓된 역사를 꾸며 왔다.

이것이 우리 고대국가인 소위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이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가 단군조선을 이은 부여의 후예임이 명확히 확인되지만, 같은 지역에 있었던 신라(통칭임, 시라, 사라, 사로, 계림, 서라벌)는 출처가 다르거니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 조각들을 모아 보면 그 출처가 명확하다.

3. 삼국의 형성과 위치(4) 신라

1). 신라의 출처

그 동안 신라의 출처는 고구려와 백제가 분명히 부여의 후예인 것과는 전혀 달리 확인되지가 않았다. 이제까지 신라는 단순히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의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라는 기록에 의지하였다.

이 조선을 일제 식민사학 논리에 의하여 한반도 평양에 위치시켜 놓았고 이에 따라 신라도 삼한 중의 진한 지역으로 하여 한반도 중부 이남의 동쪽인 지금의 경상도 지방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학 논리를 기본으로 한 것이고 수많은 신라의 출처 및 건국과정을 무시하여 아주 단순하게 왜곡시킨 것이다.

이 기록외에 수많은 사서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①신라는 그 조상을 소호금천씨로 하고 있다.(『삼국사기』, 『삼국유사』)

②신라의 근거지인 진한 사람들은 진나라 망명자들이라고 하고 있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진서』, 『양서』, 『북사』, 『삼국유사』)

③연나라 탁수지방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삼국유사』)

④신라는 낙랑과 관련이 깊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수서』, 『구당서』, 『신당서』)

이 기록들로 신라의 출처 및 그 건국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①,② 사항은 신라가 중국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출신임을 보여준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 중국 측에서도 진나라의 출신에 대하여 많은 논란과 고민이 있어 왔다.

자기들 나라의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를 자기들 정통민족이라는 화하족(華夏族)이라고 하여야 하나, 이 진나라가 원래 우리 민족 계열로써 그들이 왜곡하여 부르는 소위 동이족 출신이다.

그런데 이전 어느 시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 동쪽으로써 동이족 근거지인 산동성 지역에서 대륙의 서쪽인 하서회랑 지방으로 옮겨가서 서호족 내지는 서융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후 전부 자기들 통합 민족으로 하는 변방사지연구 즉 동북공정(동이족 등), 서북공정(진나라 등)을 비롯한 역사공정프로젝트를 계기로 하여 자기들 민족화 하였다.

결국 중국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아간 동이족 민족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소호금천씨 조상을 섬기는 것인데, 이 소호금천씨는 전통적인 동이족 조상이다.

그런데 신라 족이 진나라와 동일하게 소호금천씨를 조상으로 삼았고 진나라에서 나와 진나라 사람과 흡사하다는 많은 기록으로 그 친연성이 입증된다. 따라서 신라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간 진나라에서 역으로 다시 온 것이 확인된다.

이는 다음 ③사항에 의하여도 확인이 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진나라에서 왔고 다시 연나라와 이 연나라가 있었던 탁수, 지금의 하북성 거마하 하천 지방과 관련이 있다. 이 동쪽은 갈석산과 단군조선의 번국인 위만조선이 있었던 낙랑 지역이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의 “조선(朝鮮)의 유민” 사항과 일치한다. 따라서 신라는 서쪽 진나라 지역에서 다시 원래의 고향인 동쪽 지방으로 와서 연나라 탁수지방이자 위만조선 지역인 낙랑 지역으로 온 것이다.

이후의 신라의 이동 경로가 확인되는 사항이 바로 다음의 ④사항으로써 낙랑 사항이다. 원래 낙랑 지역은 위만조선 지역이자 연나라 동쪽 지역을 낙랑지역이라고 칭하였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BC108년에 멸망시키고 한나라 군현인 현토군과 낙랑군을 설치하면서 원래 낙랑이라는 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낙랑군이라고 칭하였다고 기록함으로써 이 지역이 낙랑지역이자 나중의 낙랑군 지역임이 확인된다.

2)신라의 건국 위치

낙랑 지역은 이렇게 한나라에게 점령당하여 한나라 군현인 설치되자 이곳에 있었던 신라를 비롯한 단군조선 계열 세력들이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남쪽의 동이족 터전인 산동성 한(韓) 지역에 내려와 삼한을 세웠다.

이곳 진한 땅에서 신라가 건국되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낙랑이다. 이렇게 하북성에 있었던 낙랑이 산동성에서 다시 낙랑으로 일컫게 된다. 이후 이곳 산동성에 있었던 신라를 수많은 중국사서는 낙랑과 연관시킨 채, 신라가 한(漢) 나라 시기의 낙랑 땅에 위치한다느니, 신라의 왕을 수차례에 걸쳐 낙랑군왕 신라왕(樂浪郡王 新羅王) 등으로 봉하게 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 낙랑의 구분.
▲ 낙랑의 구분.

 

■『신당서(新唐書)』「동이열전 신라」

新羅는 弁韓의 후예이다. 漢代의 樂浪[郡] 땅에 위치하니(居漢樂浪地),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長人[國]에 닿고, 동남쪽은 日本, 서쪽은 百濟, 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북쪽은 高[句]麗와 [접해 있다.]

武德 4년(A.D.621; 新羅 眞平王 43)에 [新羅]王 眞平이 使者를 보내어 入朝하니,

高祖는 通直散騎侍郞 庾文素에게 조서하여 符節을 가지고 가서 답을 전하게 하였다. 3년 뒤에 柱國을 除授하고, 樂浪郡王 新羅王에 봉하였다.

이러한 중국사서에 따르면 한반도 평안도 평양 낙랑군에 신라가 있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신라의 발원지나 건국과정은 한반도가 아니라 산서성과 하북성이고 여기서 진행되었다.

이후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에서는 고구려 졸본성 가까이에 있는 말갈(남갈)이 수시로 백제와 신라를 삼국 시대 말기까지도 괴롭혔다.

백제 동쪽이자 신라 서쪽에서는 하북성 낙랑 지역에서 신라와 같이 내려와 산동성 낙랑 지역에 나라를 건국한 단군조선 후손 세력인 (최씨)낙랑국이 수시로 백제와 신라를 괴롭혔다.

백제와 신라의 남쪽에는 왜가 육지로 접해 있어 특히 수시로 신라를 괴롭혔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3개의 강인 대수, 패수, 한수에서 역사적 활동을 하였다. 신라가 건국한 곳은 원래의 우리 동이족 터전인 산동성 지역이다.

다음에는 삼국 시대 다음 시기인 소위 남북국 시대이자 소위 통일신라시대인 발해의 위치와 발해 5경에 대하여 확인하고자 한다.

0 유튜브 채널 : 채널명 : “고대국가 위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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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집필본 단행본 10권중 1~6권 : 우리 고대국가 위치를 찾다(도서출판 한솜미디어, 2022,2023)

 

* 이 기사는 본지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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