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 점말동굴은 우리나라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을 처음 알렸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제천 한약방에 나온 큰 동물 뼈 파는 사람 추적

점말동굴서 구석기 코뿔소 뼈 등 4천 점 넘게 나와

더운 시기, 추운 시기 등 간빙기 구석기 유물 다양

월악산 남서쪽 덕주산성, 고려, 조선의 외적 방어성

마애불은 신라 왕자와 공주가 세웠는데 사연은 달라

 

▲ 충북 제천 점말동굴서 발굴된 동물뼈.
▲ 충북 제천 점말동굴서 발굴된 코뿔소 뼈.

 

신종근 제천답사기 2

■ 점말동굴

1973년 연세대학교 박물관 동굴 탐사단은 단양 지역을 탐사하고 돌아오던 와중에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제천 한약방에 처음 보는 동물의 커다란 뼈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문 끝에 탐사단은 풍문이 사실이며, 뼈들은 이미 서울의 제기동 약령시장에 팔려 버렸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추적 끝에 그들은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에 이른다. 동굴엔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생생했다.

임시 발굴에서만 무려 4,000점이 넘는 유물을 발견한 탐사단은 정부의 정식 허가를 얻어 본격적인 조사를 개진한다. 발굴은 7년간 계속된다.

길고 긴 조사 끝에, 이 점말동굴은 남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한 구석기동굴 유적임이 밝혀진다.

구석기 중기에서 후기까지의 유물들이 골고루 발견되고 각종 짐승 뼈 화석과 꽃가루가 층층이 쌓여 있어 그 무렵 한반도의 식생과 자연 환경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점말동굴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코뿔소의 앞다리뼈다. 코뿔소 뼈는 점말동굴이, 제천이, 남한이, 한반도가 간빙기 아열대 기후를 겪은 적이 있음을 확실히 증명한다.

그 밖에도 더운 지방에서 사는 동물들의 흔적이 여럿 발견되었다. 물론, 다른 층에서는 추운 지방에서 사는 동물들이 더 많이 나왔다. 긴 빙하기와 짧은 간빙기.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점말동굴은 구석기 시대, 아열대 기후를 보이던 제천 지역의 한때를 명확히 증거한다.

■ 덕주산성과 마애불

덕주산성은 월악산의 남서쪽을 거의 둘러치다시피 한 석축산성이다. 덕주산성은 둘레가 15km에 달하고, 무려 4중의 성벽으로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외적의 침략을 막는 요새로서, 1254년(고려 고종 41년) 9월과 1256년(고려 고종 43년) 4월, 몽골군 공격을 막아냈다.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요긴하게 쓰였다. 조선 숙종 시기에는 유사시 조정의 긴급피난처로 도모되었을 정도다.

덕주사 마애불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왕의 직계 자손 가운데, 큰딸 덕주德周 공주, 형인 김일金鎰 왕자(마의태자), 막내 김황金皇 왕자는 고려에 빌붙어 구차하게 연명하기보다, 다른 곳에서 신라의 명맥을 이어가길 원했다.

그중에서 덕주 공주와 김일 왕자는 금강산으로 가다가 문경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날 밤 꿈에 관세음보살이 공주와 왕자에게 "마애불을 세우라."고 명하자 둘은 서쪽의 큰 터를 찾아가 절집을 짓고, 절벽에 마애불을 새기며 그 후 8년을 공양하였다. 그 장소가 바로 마애불이 있는 절벽이다.

이후 덕주 공주는 아예 불교에 귀의해 덕주사가 있는 송계리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왕자 김일만이 신라 회복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홀로 금강산으로 떠났다.

아무튼 덕주사마애불의 얼굴은 덕주 공주의 얼굴을 본 딴 것이며, 그 대척점에 자리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석불입상은 동생인 마의태자상이라는 전설도 같이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덕주사 창건 설화는 마애불에 얽힌 이야기를 다르게 전한다. 덕주사는 김황과 덕주 공주가 자의로 떠돌다 멈춰 불사를 세운 곳이 아니라 왕건이 신라를 병합하면서 경순왕의 복종을 담보할 인질로 덕주공주를 감금한 곳이라고.

왕건은 옛 세력이 태자와 공주를 중심으로 신라 복위 운동을 펼까 두려워 덕주사 주변에 여러 겹으로 성을 쌓고, 수만 명의 병력으로 감시했다 한다.

또한 왕건은 경순왕의 큰아들 김일(마의 태자) 역시 충주의 미륵사에 감금해 후환을 대비하였다. 이에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덕주 공주는 동생을 그리며 그가 있는 남쪽을 향해 마애불을 조각했고, 미륵사의 김황은 누나를 그리며 북쪽을 향해 미륵불을 세웠다 전한다.

그러나 정사正史에 명시된 기록에 덕주사는 587년(신라 진평왕 9년)에 처음 세워졌고 정확한 창건 연대나 창건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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