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외척의 발호를 막지 못해 멸망하였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태종 이방원, 세종 배후에서 상황으로 왕 노릇 계속

왕권 안정을 위해 사돈 심온 등 외척 도륙, 노비로

세종의 비, 소헌왕후 지옥 같은 궁궐 생활 잘 극복

한양의 대 화제 때 세종이 없는 사이 진화 진두지휘

세종과 더불어 조선 시대 이상적인 국모로 내내 칭송

 

▲ 조선 세종 비, 소헌왕후.
▲ 조선 세종 비, 소헌왕후.

 

<세종대왕 탄신일과 스승의 날은 같다>

ㅡ 소헌왕후: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왕비가 된 세종의 비 ㅡ

그저께는 세종대왕 탄생일(1397년 5월 15일)이었다.

세종대왕의 왕비는 소헌왕후(1395~1446)로 세종보다 2살이 많다.

세종이 왕위에 올랐는데도 상왕인 시아버지 태종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어서 세종은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상왕인 태종은 외척의 발호를 막는다며 소헌왕후의 아버지, 즉 세종의 장인(심온)을 죽이고 장모와 식솔을 노비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세종이 부인인 소헌왕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소헌왕후는 일국의 왕비가 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엄청난 고난'이 되었고 그렇게 그녀는 괴로운 왕실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 태종, 사돈어른을 영의정에 부임시킨 후 모략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의 망나니짓이 절정에 달하자, 시아버지인 태종이 양녕대군을 내쫓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덩달아 그녀는 세자빈이 되어서 경빈(敬嬪)으로 봉해졌고 충녕대군이 국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자 태종 이방원은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심온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는 상왕인 태종 이방원이 심온을 숙청하려는 사전조치였다.

당시 세종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태종인 이방원은 상왕 임에도 군사권만큼은 자신이 완벽하게 행사하고 있었는데

​강상인(태종의 심복이었다)이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2. 소헌왕후 집안에 대한 철저한 숙청

사실 사안만 보면 강상인이 한 행동이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지만, 강상인은 세종에게 군사보고를 했다고 죽임을 당한다.

이것에 대해 상왕 이방원은 자신이 모욕당했으며, 강상인이 '왕명 없이 함부로 군을 움직였다'라며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황당하게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이 사건과 연루시킨다.

사은사로 세종대왕의 즉위를 명나라에 고하러 갔던 심온는 국경을 넘어 평안북도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포박당하는 신세에 처한다.

심온은 엄청난 고문 후 사약을 먹고 죽었고, 심온의 형제와 자식들까지 귀양을 가게 된다.

심온의 아내와 딸들은 '변방의 관노'로 가게 되는 등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 났다.

소헌왕후의 모친은 자식이 왕후임에도 한동안 노비의 삶을 산 것이다. 이들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사면되었다.

3. 소헌왕후, 한양의 대화재를 진압하다.

실록에는 소헌왕후에 대해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 8년 한양에 큰불이 났을 때, 당시 지방에 나가 있던 세종대왕을 대신해서 한양의 대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금성대군을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다.

당시 세종대왕이 지방에 출타한 까닭은 '강무'라는 사냥 겸 군사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세자 문종도 아버지를 수행했었기 때문에, 당시 정승이었던 황희는 한양의 대화재를 세종이 아닌 소헌왕후에게 먼저 보고한다.

이때 한양의 대화재는 한양의 1천 가구나 태울 만큼 엄청난 대화재였다.

소헌왕후는 그 보고를 받은 후 정신을 가다듬고는 '종묘라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진두지휘한다.

그렇게 그녀는 경복궁과 종묘는 무사히 지켜냈다. 여장부다운 소헌왕후의 일면이다.

만년에는 병이 생겨서 자주 피접을 나갔다가, 1446년 이질 때문에 향년 52세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눈을 감았다.

그 패륜적인 행동을 일삼은 수양대군, 즉 세조도 어머니 소헌왕후에겐 갖은 효도를 다 하였다고 한다.

4. 조선시대 이상적인 국모로서 내내 칭송

세종대왕이 조선 시대에도 이상적인 군주의 본보기로 꼽혔듯이 소헌왕후 역시 이상적인 왕비의 본보기로 조선 시대 내내 칭송받았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소헌왕후가 이끌었던 내명부는 조선 시대 통틀어도 가장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회자하는 말로는 만약 소헌왕후가 더 오래 살아서 손자 단종의 치세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년)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세조는 어머니가 뻔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친동생들(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끝내 죽이는 등의 패륜을 감히 벌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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