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 황사영, 신앙을 위해 나라를 뒤엎으려 하였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신종근 제천답사기 2

사도세자 죽음 당연시하는 벽파, 동정하는 시파

시파에 천주교 신자 많았으나 정조 관대 정책 펴

정조 죽고 벽파 집권, 천주교 사교화 탄압 시작

천주교 신자 황사영 북경주재 서양 신부에 백서

‘조선 청에 복속, 서양 함포로 조선 굴복 시켜야’

1801년~ 1866년까지 자국민 1만 3천여 명 학살

 

▲ 황사영은 1801년 음력 2월부터 9월 22일까지 7개월간 배론 토굴에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 황사영은 1801년 음력 2월부터 9월 22일까지 7개월간 배론 토굴에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 배론성지, 황사영 백서사건

배론은 1801년 황사영 백서(帛書)사건과 우리나라 최초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또한 길 위의 사제,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1821~1861) 신부 묘지도 있다.

체제공과 정조가 잇달아 죽자, 정순왕후와 벽파(僻派, 사도 세자가 죽은 것이 당연하다)가 권력을 잡았다.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벽파는 대공세에 나섰다. 명분은 천주학이었다. 1801년 정순왕후는 언문 교지를 내려 천주학쟁이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시파(時派, 죽은 사도 세자를 동정하는) 탄압을 위해 사전에 기획한 '사학 프레임'이었다. 천주교 지도자였던 이승훈과 이가환, 이벽, 권철신이 체포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종, 정약용도 끌려왔고, 박지원과 박제가도 잡혀왔다.

그러나 정약용은 살기 위해 셋째 형 정약종을 원수처럼 여겼고, 조카사위 황사영과 교우를 물고 들어갔다.

정약용이 말했다. "주문모에게 세례받은 자 중 황사영이 있다. 사영은 나의 조카사위다. 그를 잡으면 토사(討邪)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황사영과 그 일당들은 깊이 숨어서 잡기 어렵고 죽어도 불변할 자들이다. 그들 주변에서 물이 덜 든 노복이나 학동을 붙잡아 형문하면 그 상전의 행방을 혹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정씨 형제는 죽음을 면하고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황사영은 스승이자 처삼촌이었던 정약종이 참수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배론으로 몸을 피했다.

황사영의 운명은 스승 정약종을 만나면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황사영은 정약종에게 학문과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알게 된 정약현의 맏딸 정명련(정난주)과 혼인했다.

정씨 일가는 한국천주교회사와 맥을 같이 한다.

다산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다산의 맏형은 정약현, 둘째 형은 정약전, 셋째 형은 정약종이다. 정약현의 처남은 이벽이요, 사위는 황사영이다.

정약전은 배교한 후 흑산도로 유배되어 물고기를 연구하며 <자산어보>를 남겼다. 정약종은 부인 유소사와 아들 정철상, 정하상, 딸 정정혜까지 일가족 모두 순교했다.

다산은 문초를 받고 18년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누이는 한국천주교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부인이다.

이승훈은 배교하고 죽었으나, 아들 이신규, 손자 이재의 증손자 이연규, 이균규은 순교하였다. 다산은 다른 사람 묘지명은 써 주었으나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 묘지명은 써주지 않았다.

황사영은 1801년 음력 2월부터 9월 22일까지 7개월간 배론 토굴에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다. 가로 62cm, 세로 38cm 비단에 먹을 갈아 작은 붓으로 한 줄에 100자씩 13줄 깨알같이 써 내려간 13.384 자를 보면 놀라운 집중력과 지극한 정성에 탄복하게 된다.

황사영은 백서(帛書)를 1801년 음력 10월 중국 북경으로 보내려 했으나 심복이었던 황심과 옥천희(玉千禧)가 연이어 체포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황사영은 1801년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원본 백서는 의금부에 보관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 파기 때 발견하여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인수하였다.

뮈텔은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 순교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행사) 때 교황 피우스 11세에게 전달하였고,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과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황사영은 서소문에서 능지처사 되었다. 어머니와 부인은 거제도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정명련(제주도 올레길을 걷다보면 무덤을 볼 수 있다)은 제주도 가는 배 안에서 포졸과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며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해 달라고 간절하게 청했다.

그들은 두 살배기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놓고 갔다. 이후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은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예초리 언덕배기 솔밭에 묻혔다(추자도 올레길을 걷다보면 무덤을 볼 수 있다)

황사영이 죽자, 정하상(정약종 둘째 아들)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침체에 빠져있던 조선 천주교회를 다시 일으켰다. 외국인 신부를 데려오고 신학생 3명을 선발(김대건, 최양업, 최방제)하여 북경까지 데리고 가는 등 초기 한국천주교회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정하상은 조신철과 함께 로마 교황 레오 12세에게 편지를 썼다. 조선에 교구를 설치해달라는 것이었다.

교황청에서 포교성 장관으로 있던 카펠라리 추기경은 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레오 12세가 선종하자,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16세다.

그는 1831년 9월 9일 조선에 교구 설립을 허락하고 주교를 파견하였다. 첫 주교는 브뤼기에르였다. 이어서 제2대 앵베르, 제3대 페레올, 제4대 베르뇌 주교가 임명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 신부 양성을 위하여 로마교황청에 신학교 설립을 요청하였고, 1855년 프랑스 외방선교회 메스트로 신부는 배론에 한국 최초 성 요셉신학교를 세웠다.

신학교는 장주기가 살던 집이었다. 장주기는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신학생 10명을 선발하여 가르쳤다. 교장은 푸르티에(Pourthie 1830~1866), 교수는 프티니콜라 신부였다.

신학교 설립 11년 후, 1866년 2월 두 신부와 장주기는 체포되어 두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장주기는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당했다.

이후 배론은 신앙촌이 되었고 1922년 공소강당을 신축했다. 신학교와 공소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탔다. 공소는1956년 다시 지었고, 신학교 건물은 2003년 복원하였다. 배론은 2006년 성당이 되었다.

■ 길 위의 사제 최양업 신부

배론에는 '길 위의 사제',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 묘소가 있다. 최양업은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다.

1821년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예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최경환과 이성예는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하였다.

어머니 이성예가 잡혀가자 남아있던 최양업 동생 네 명은 걸식하며 살았다. 어머니 사형집행일이 정해졌다는 말을 들은 둘째 아들 열두 살 최의정(최의정은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의 증조부다)은 네 형제가 동냥으로 모은 돈과 쌀자루를 들고 망나니 집을 찾아갔다.

"우리 어머니를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에 가게 해주십시오." 망나니는 이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밤새도록 칼을 갈았다.

1836년 12월 3일 프랑스 모방 신부는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뽑아 홍콩 마카오로 보냈다.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최양업은 4년 늦은 1849년 4월 15일 사제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13개월만에 순교하였지만, 최양업 신부는 이때부터 11년 6개월 '길 위의 사제' 여정이 시작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하루에 짧게는 80리, 길게는 100리를 오가며 강원과 경기, 충청, 경상, 전라도 산간오지 교우촌을 찾아다녔다.

또한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 보내고, 천주가사를 짓고, 한글 교리서를 만들고, 서양악기까지 들여와 가르쳤으니, '땀의 순교자'라 불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1861년 6월 15일 교우촌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경북 문경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나이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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