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역의 문란과 정세 오판이 임진왜란을 불러왔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전쟁 징조 무수하였으나 안일한 대비로 왜란 자초

왜군 침공 소규모로 파악 경남지역 국한 전쟁대비

방군수포제의 문란과 제승방략제 비현실성 드러나

2백 년 가까운 평화로 백성들 전쟁대비 노역 불만

 

▲ 한국방송의 임진왜란 방영 홍보물
▲ 한국방송의 임진왜란 방영 홍보물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불완전한 정보와 오랜 평화에 쩔어 제대로 대비 못 해>

우리는 임진왜란이 사전에 무수한 침략의 징조가 있었지만, 조선조정이 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해 자초한 비극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고 1592년 개전 직전까지 쉴 새 없이 진행했다.

그러나 조선이 생각한 침공의 규모(1만 명)와 도요토미가 실제 실행한 침공의 규모(20만 명)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였다.

왜군은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데다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200여 년간 전국적인 큰 전란이 없었던 조선의 준비는 일본의 침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 조선 조정은 남부지역 중심으로 침략 대비

(1) 남부 삼도의 방어 준비

일본군을 직접 상대할 남부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특히 왜와 인접한 경상도에는 많은 성을 쌓고 영천, 청도, 합천,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의 병영을 신축하거나 고치게 했다.

이때 노비와 일반 백성, 양반까지 싹 다 모아서 동원했다. 이 양반 동원 때문에 지방 사족들과 충돌이 일어났기도 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그간 주 침탈 대상이었던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경상 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부산 - 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2) 선조도 군액 보충 노력

조선의 병역제도는 '양인개병제'였는데, 16세기 들어 농민이 국가에 군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는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가 일반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방관이 부정으로 군포를 거두고 거둔 군포로 사리사욕에 채우는 경우가 만연했다.

그 결과 군역을 지는 이가 적어지고 비상시 필요한 예산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3) 이순신 파격 승진, 유능한 장수의 남부지역 배치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수들은 남쪽 위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종 6품 지방 현감으로 무명의 장수였던 이순신을 전쟁 발발 1년 전인 1591년 2월 13일, 공을 세우라는 전교와 함께 단 하루 만에 8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선조의 보호 아래 고속 승진한 이순신은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이게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 외에 이억기, 이천, 양응지, 원균 등 당시 이름 있는 장수들을 대거 남쪽으로 배치했다.

2. 그러나 충분한 대응 실패 : 정보수집의 한계에, 평화에 길들어져 불평과 민심 피폐

(1) 정보 수집에 한계

일본군의 규모를 수만 명 정도로 예상하여 전쟁대비를 하는 큰 오류를 범했다.

조선이 일본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가 컸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전국시대 돌입 후인 1479년~1590년 동안 조선 통신사 파견이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직접 정보 수집을 할 수 없게 된다.

1590년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공 정보를 수집했으나 근 100여 년 동안 정보가 없어 이해하기 어려웠던 데다

일본이 왜, 어떻게, 얼마나 쳐들어오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조선으로선 조선 전기에 있었던 삼포왜란 등의 경험을 토대로 규모가 좀 더 커진 (일반적인) 전쟁으로 예상해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2) 평화에 길들어져 노역에 불평 쏟아냄

그런데 조정도, 백성들도 너무 오랜 기간 평화에 길들여져 있어,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태평 시대에 당치 않게 성을 쌓느냐"는 상소가 빗발쳤다. 국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도 공사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니 병법의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등의 정비는 논의조차 못 했다.

(3) 군사통제 체제 허점 개선 실패

유사시 각 향촌에서 군사를 군사 거점에 집결시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도록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허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류성룡은 "군사가 모여 있더라도 지휘관이 내려오기 전에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리멸렬할 것이니 각 지역 수령들에게 군사통제권을 부여해 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시행해오던 체제를 바꾸기는 힘들다"는 반론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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