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민간인을 학살한 친일부역 집단, 서북청년단이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

 

윤석열 제주 4.3 추념식 불참하여 대선공약 어겨

제주 현지에 학살세력 서북청년단 기세등등 활개

이재명 야당 세력도 제주 4.3의 진정한 의미 외면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 제주 4.3 진실 담아 전해

▲ 미제의 제주도 봉쇄를 통한 무력 지원으로 제주도민의 자주독립투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 미제의 제주도 봉쇄를 통한 무력 지원으로 제주도민의 자주독립투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학살당한 가족에 오열하는 민간인 뒤로 미제 장교가 싸늘하게 내려다 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에 있은 제주 4.3 봉기는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투사들과 제주도민이 중심이 되어 일제 치하 왜구에 부역하던 친일 반민족 역도들의 만행과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미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자주 독립투쟁이었다.

제주4.3봉기는 서기 1947. 03. 01.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친일경찰이 민간인을 말발굽으로 치어 죽였음에도 사과는커녕 항의하는 민간인을 죽이고 고문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은  4월 3일을 기점으로 총 봉기하였다.

왜구는 물러갔으나 그 밑에서 동포를 학살, 고문하여 왜구에게 이쁨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부역자들이 왜구를 대신하여 다시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이승만의 분단 획책과 배후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미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자주 독립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서기 1954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갑오년의 동학혁명 이래 최대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제주도민이 이같이 봉기하자 봉기 초기에 이승만 정권은 일제 치하 평안도 지역에서 일제에 굴복하여 주구 노릇 하던 기독교 계열의 서북청년단을 부추겨 이들에게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하도록 하였다.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 일제 치하 왜구에 부역한 세력이었고 북에서는 이들의 부역 행위로 얻은 재산이 몰수당하여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고 친일부역청산의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한 지역사회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남한으로 대거 내려왔다.

이들은 반민족 행위를 참회하기는커녕 이를 지적하고 벌을 준 북한 정권을 증오하고 북한 정권이 체제로 삼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이를 갈았다.

제주에서 사회주의 계열 세력의 자주 독립투쟁 불길이 타오르자 이승만의 비호 아래 제주도로 내려가 ‘빨갱이’를 잡는다며 제주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것이 제주 4.3의 진실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 역도를 청산하지 못한 업보가 75년이 지나고 있는데도 역사의 심판을 받아 사라졌어야 할 서북청년단이 버젓이 활개 치도록 한 것이다. 민족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일이다. 하기야 ‘국짐’으로 대표되는 민족반역 매국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는 현실이니 그 찌꺼기인 서북청년단이 날뛰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암묵적으로 윤석열 정권의 비호를 받는다고 봐야 한다.

이에 제주 4.3 학살의 진실을 압축적으로 밝히는 울분에 가득 찬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이다. 아래에 전문을 싣는다.

<한라산>

서시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

동아시아의 해군기지로서 조선이 결정된 지

80년의 모진 세월이 흐른 1945년 불볕 여름

한 손에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총독부가 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창살 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침략사 120여년,

다시 써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1948년 4월 3일 ‘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 간

이름 없는 해방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며

뼈를 깎는 모진 고문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 버린 그들은 갔다.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 것인가.

분노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통곡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尾帝의 각을 뜨다

적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다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30여년 만에 걸어 보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로 쌓여 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멀리 사람 실은 배 한척, 돌 실은 배 한척, 떠나는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이파리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 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날,

한 무리의 서북청년단이 17살도 안 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

목이 잘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빨갱이다!”

"빨갱이의 종말은 이렇다!”

광장을 가득 메운 도민들에게 허수아비의 졸개들이

이미 죽은 시체들을 대검으로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하게 찢어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도민들은

저건 이덕구,저건 김운민,저건 김병남,남진,박남해……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푸줏간에 걸린 한낱 짐승일 뿐이었다.

한 개의 총알이 심장을 뚫고 간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 듯이 뒤흔들고 있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멀리 관덕정 인민광장위로 지고 있었다.

산은 다시 한 번 알몸이 되고

그 빈숲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 흘러가고 죽어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흘러갔다.

몸 가릴 곳 하나 없는 이 참혹한 겨울숲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걷는 이 학살의 숲

누가 그날을 기억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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