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 장인환 같은 의사들이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글: 민인홍(민화협 대의원, 대종교 전리)

 

전명훈, 장인환 먹고살고자 미국서 어렵게 살던 중

일제 침략 정당화 선전, 한국 모독한 스티븐스 처단

전명훈, 장인환 각자 스티븐스 처단 계획 후 실행 옮겨

전명훈 권총 불발, 장인환은 스티븐스에 3발 명중 처단

이승만, 이들은 살인자라며 종교적 신념 들어 변호거부

스티븐스 처단으로 미국 한인사회 ‘국민회’창설로 뭉쳐

의열투쟁, 이토 처단, 일왕 저격, 윤봉길 의거 등 봇물

▲ 장인환, 전명훈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신문. 가운데 모자 쓴이가 스티븐스, 왼쪽이 전명운 의사, 오른쪽인 장인환 의사(편집인 주). 자료출처: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https://v.daum.net/v/20200323043316937에서 발췌 ).
▲ 1923. 3. 24. 장인환, 전명훈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신문. 가운데 모자 쓴이가 스티븐스, 왼쪽이 전명운 의사, 오른쪽인 장인환 의사(편집인 주). 자료출처: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https://v.daum.net/v/20200323043316937에서 발췌 ).

 

115년 전 3월 23일, 스티븐슨 저격 사건이 있었다.

'전명운'과 '장인환'은 사전에 모의한 바 없었지만, 한날한시에 스티븐슨을 저격하기 위해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1908년 3월 23일은 월요일이었다. 오전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 항 페리호 부두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시 귀국 중이던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총을 맞고 쓰러졌고, 현장에서 두 명의 한국청년 전명운(25)·장인환(33)이 체포되었다.

후송된 스티븐스는 이틀 후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고 두 사람은 재판에 넘겨졌다.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9년 특사로 풀려났다.

스티븐스는 미 국무부에서 근무하다가 워싱턴 주재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 외교무대에 등장한 것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한성조약(1885)이 체결될 때였다. 그는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를 자문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욱일장(旭日章, 훈장)’을 받았다.

1904년에는 한일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를 강제 체결케 하여 12월 27일 대한제국 외부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을사늑약(1905),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등에 관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스티븐스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틀 전인 3월 21일, 일본 선편 니폰마루(日本丸)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선상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Japan’s Control, A Benefit to Corea)’라는 제목의 친일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한국은 1년 전(1907) 7월 이완용이 통감 사저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1905)에 이어 이 조약으로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의 한국 병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스티븐스는 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적 ‘보호’를 다음과 같이 왜곡 선전하였다.

1.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 사람 사이에 교제가 점점 친밀하며,

2.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백성을 다스림과 같고,

3. 한국 신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계에 참여치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시골의 농민들과 일반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아니함으로 농민들은 일본사람을 환영한다.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등에 이 회견내용이 보도되자 한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왔다가 미주 본토로 들어온 노동자와 유학생, 우국 망명자들이 한인의 권익 신장과 조국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 공동회를 개최하고 최정익 · 문양목 · 정재관 · 이학현 등 4명의 대표를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호텔(Fairmont Hotel)에 보내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대표들은 다음 날 스티븐스를 찾아가 망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지만, 스티븐스는 간단히 이를 거부하였다.

“한국에는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요 동양에 대행(大幸, 큰 행운)이다. 내가 한국 형편을 보니 광무황제의 실덕(失德)이 크고 완고한 무리가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러시아에 빼앗겼을 터이라고 일본 정책을 도와 말하며 신문에 낸 것이 사실이니 다시 정정할 것이 없다.”

분개한 한인 대표들이 스티븐스를 난타하는 등의 한 차례 승강이가 벌어진 뒤, 대표들은 호텔에 있던 사람들에게 스티븐스의 폭언과 망언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물러났다. 대표들에게 스티븐스의 망동을 전해 들은 교민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분노하는데 그치지 않고 즉각적인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이가 '전명운'과 '장인환'이었다.

두 사람은 1905년에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가 이듬해 본토로 이주해 온 젊은이였다.

장인환(1875~1930)은 평양 출신으로 철도 공사장,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서울 출신의 전명운(1884~1947)은 철도 쪽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온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면서도 이들은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모아 설립한 공립협회에 각각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들은 각각 스티븐스를 저격해 처단하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아무도 이들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암살 계획을 각각 따로 진행했으며, 서로 같은 목적이 있었는지는 물론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조직 차원의 정교한 계획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기도 했다.

의거 당일,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역에 들어서던 스티븐스를 향해 손수건으로 싼 권총을 발사했지만, 그의 리볼버는 발사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후려치고 달아났고 스티븐스가 피를 흘리며 그를 추격하려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장인환'은 침착하게 자기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총알은 몸을 피하던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의 몸을 관통했다. '전명운'의 상처는 위중했지만 회복되었던 반면, 스티븐스는 이틀 후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두 사람이 재판에 넘겨지자 한인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고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애당초 '이승만'에게 통역을 맡겼으나 그는 두 사람의 행위를 살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두 사람이 법정 최고형을 받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전명운'은 공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특별한 학식이 없어 나라를 별달리 보국할 방책이 없으나 언제든지 우리나라가 일본과 독립전쟁을 개시하는 날에는 나는 반드시 칼을 차고 총을 메어 떨어지는 날 가을 풀에 말머리 행오(行伍, 행렬) 앞에서 나의 한 창자 더욱 피를 솟을 뿐이다.”_장인환 의사

장 의사는 한때 귀국에서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우울증을 앓다가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1975년 '장인환'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전명운' 의사는 훗날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살았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는 1947년 타계해 LA에 묻혔다가 199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면서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는 살기 위해서 하와이로 건너온 이들이었다. 독립운동을 목표로 망명하거나 유학을 온 유복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행동으로 일제 침략의 하수인 스티븐스를 응징함으로써 각기 대한의 청년임을 증명했다.

이 무명 청년들의 의거는 국내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거는 한국 병탄을 목표로 한 일제의 침략과 그 하수인인 스티븐스의 비열한 행위를 국제여론에 알렸다.

또 민족의 항일 의지를 가다듬어 효과적인 항일민족운동 추진의 계기가 되면서 미주 한인사회를 ‘국민회’로 통일하여 미주 항일 독립운동의 본산 구실을 하게 하였다.

이후 국내외에서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강우규'의 사이토 총독 저격(1919), '김지섭'(1924)과 '이봉창'의 일왕 저격(1932), '윤봉길'의 홍코우 의거(1932) 등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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