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독립투쟁사에서 투쟁 단체들 사이에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이 많았다.

글: 민인홍 (민화협 대의원)

 

처음 대종교 중광단과 유림의 공교회가 대한정의단 창설

왕정복고주의의 공교회, 공화주의의 서일의 군정서와 결별

공화주의 임시정부, 석주 이상룡, 서일이 대한군정서 창단

이상룡과 김좌진의 서신, 대의를 위해 하나됨을 보여줘

▲  청산리대첩의 주역, 북로군정서 독립군들
▲ 청산리대첩의 주역, 북로군정서 독립군들

 

사람 사는 곳에서 둘 이상이 모이면 어디든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독립투쟁을 하자고 모인 동포사회의 지사들 간에도 갈등은 비일비재했다.

유림의 생각과 신학문을 한 사람의 생각이 달랐고, 종교와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끼리도 모이면 흩어졌다. 임시정부도 사실 1944년도에야 갈등을 겨우 봉합한 상태에서 비로소 좌우를 망라한 통합을 이뤘다.

대종교 종사 서일은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중광단을 설립한다. 명칭에서부터 대종교의 중광을 뜻하는 것으로 대종교도들이 주축이었다.

중광단의 지도부 요원은 대종교인이면서 교육자이다 보니 군대를 경영할 식견이 부족했고 무장시킬 수 있는 재원도 부족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25일 마침내 유림이 중심이 된 ‘공교회(孔敎會)’와 연합해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발족하게 된다.

대한정의단 자체는 엄밀히 말해 군사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일은 예하에 ‘대한군정회’라는 군사단체를 별도로 만들어 김좌진에게 군사문제를 전담케 했다. 군수물자의 지원은 대종교 총본사와 각 본사 교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좌진은 명실상부한 군사조직을 만들기 위해 서로군정서 독판인 석주 이상룡에게 참모진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김좌진의 요청으로 온 인원들이 바로 일명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대한 군정서’의 핵심 요원들이다.

길림시 정서와 서로군정서 계통의 요원들 즉, 조성환, 이장녕, 이범석, 김훈 등이 그들이다. 신학문을 익힌 군사 인재 집단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은 신민회 계통의 공화주의자들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한정의단'의 한 축을 이루었던 '공교회' 쪽에서는 공화주의를 견지하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복고를 지상과제로 삼는 공교회 측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발이었다. 서로 결별했다. 김 성극, 이규, 강수희 등이 탈퇴해 ‘대한광복단’ ‘대한정의군정사’로 각각 흩어졌다.

임시정부의 확고한 민주 공화주의 표방이나 이상룡 등 대종교인들의 공화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서로군정서의 경향 등으로 마침내 대한정의단이 민족주의적 공화주의 항일무장단체로 거듭난다. 서일은 대한정의단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후에 상해 임정의 요청으로 대한군정서로 개칭함)’로 재발족한다.

'이범석'도 '김훈'도 덕원리에 자리잡은 군정서 총재부의 총재 서일에게 큰절로 부임 신고를 했다. '조성환'도 '이장녕'도 그곳에서 서일을 만나 훗날을 다짐하고 독립을 꿈꾸었다. 대종교 총본사와 북로군정서는 조국광복의 꿈을 꾸는 총본산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김좌진의 능력, 인품, 처신도 훌륭했겠지만, 대종교의 지원이 지대했다.

“밀십(密什)에서 맹서한 것도 변하지 않았고 화전(樺甸) 입구에서 한 약속도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번 남북으로 흩어지니 소식이 묘연하더니 뜻밖에 두 젊은이가 편지를 가지고 찾아와 오래된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는 의리에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삼가 봄이 한창인데 객지에서 기체가 나라를 위해 만중하신지요. 군정서의 일이 날로 발전하여 실력을 완전히 갖추셨으니, 저로 하여금 망양지탄(亡羊之歎)을 금할 수 없게 합니다.

더구나 좌우께서는 간성지재(干城之才)로 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범위가 작지 않은 데다 널리 계책을 연합하여 결집함에 인력도 있고 실력도 있으시니 무슨 일인들 잘하여내지 못하시겠습니까?

다만 관할하는 지역이 매우 넓어 조석으로 서로 만나 긴밀한 협조를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저 계원(啓元)은 이곳에 도착한 후로 마침내 여러 사람의 권유로 만에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직임을 맡아서 세월만 보내고 진전은 조금도 없는 중에 봄기운이 이미 생겨나고 있으니, 자칫 시기를 놓쳐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면 한갓 여러분들에게 장애만 될 듯하여 매우 두려울 뿐입니다.

이장녕(李章寧) 군은 이곳에 있으면서 이미 띠고 있는 직명이 있는 데다가 긴요한 일로 심양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약 마음을 같이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요청하신 뜻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귀서와 본서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에 기관으로 차별해서 달리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부득이 이미 맡은 직무를 낱낱이 되돌리고 지금 진행 중인 일을 철폐하여 말씀하신 대로 보내오니 좌우께서는 저의 충심을 생각하시어 진실한 마음으로 연대하시고 경계를 두지 말고 일치하여 함께 나아가기를 천만 간절히 바랍니다.”

참모로 '이장녕'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김좌진'의 서신에 대한 '이상룡'의 답신이다. 둘은 서른한 살 차이다. 세대를 무색하게 하는 대인들의 면모가 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백야 김좌진과 석주 이상룡이 모두 대종교인이어서 가능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이자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북로군정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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