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혁의 시발점인 분노를 부정한 것으로 사회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

글: 박황희(고려대 겸임교수)

 

 

공자는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싫어하는 사람 보지 못해

인을 실천하는 것이 바보, 손해로 보는 사회는 희망 없어

분노를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 부정한 기득권이 조성

국회의원들, 불의 보고도 분노 안 하는 생계형 자영업자

정치인은 숭배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감시의 대상일 뿐

▲ 체 게바라. 그는 자본주의의 불의를 보고 사회주의 혁명에 뛰어 들었다(편집인 주).
▲ 체 게바라. 그는 자본주의의 불의를 보고 사회주의 혁명에 뛰어 들었다(편집인 주).

 

[불의에 대한 분노와 침묵]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할 나위가 없고, ‘불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인’을 행함에 있어서 ‘불인’한 것이 자기 몸에 더해지지 않도록 한다.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공자는 두 유형의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다. 인을 좋아하는 소극적 행위자와 불인을 미워하는 적극적 행위자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다. 즉, ‘호인자(好仁者)’와 ‘오불인자(惡不仁者)’는 상호 필요 충분 조건의 대비를 통해서 만이 그 실체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힘써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냉혹하였다. 인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불인한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는 증거이다. 인을 실천하고 사는 것이 바보가 되는 일이요 손해 보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

세상은 결코 ‘호인자(好仁者)’ 만으로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지 않는다. ‘오불인자(惡不仁者)’의 적극적인 행위가 인(仁)의 가치를 세상에 실현하는데 훨씬 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오불인자(惡不仁者)’의 방법론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불인한 것이 자기에게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적폐를 개혁하려는 적극적인 방법은 불인을 미워하는 ‘오불인(惡不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인에 대해 분노하는 ‘노불인(怒不仁)’에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분노’는 사회적 금기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이며 자기절제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되고 만다. 이 때문에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겠다거나 누구에게도 욕을 먹고 싶지 않다는 목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사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진리’가 ‘다수결’이 아닌 것처럼 ‘정의’ 또한 ‘인기순’이나 ‘지지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평판이나 도덕적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대한민국의 전임 대통령이 ‘호인자(好仁者)’였다는 것에는 굳이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오불인자(惡不仁者)’가 아니었으며 ‘노불인자(怒不仁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개혁을 열망하는 한국 사회에서 불의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생계형 정치 자영업자들은 이제 그만 정치 일선에서 퇴장하여야 한다. 언제나 ‘국민’과 ‘민생’을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속내는 자신들의 권력욕과 밥그릇 싸움을 위한 이전투구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국민을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을 위한 권력의 방편으로서 정치적 ‘수단’으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의 4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들에게 양질의 정치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정치인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국민이 임명한 국민의 공복으로서 언제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아직도 문재인을 보고 성공한 대통령이니 문재인 보유국이니 하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대·깨·문’과 박정희를 한국의 산업화를 이룬 난세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태극기 부대’는 맹목이라는 이름의 이란성 쌍둥이일 뿐이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정치인들은 언론이나 검찰의 표적이 되기를 두려워하고 유권자들의 표의 향배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소신이나 신념 없이 오직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골몰하는 정치 낭인들에게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불렸던 체 게바라의 명언을 남긴다.

“모든 불의에 분노하라.”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