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자랑, 전방후원분도 한땅의 장고형 무덤이 뿌리다.

 

전방후원분서 나온 철기류 물건은 가야인들의 작품

당시  왜인들은 철을 만들거나 가공할 기술 없어

기마민족 상징, 구리로 된 솥, 동복은 가야인들 것

가야인들 개척시 일본은 농경의 상징, 소와 말 없어 

양직공도 왜인의 모습은 맨발로 미개 못 벗어난 상태

 

▲ 가야 철모와 갑옷(좌), 일본 전방후원분 출토 왜 철모와 갑옷과 철재 유물(중, 우)
▲ 가야 철모와 갑옷(좌), 일본 전방후원분 출토 왜 철모와 갑옷과 철재 유물(중, 우)

일본 사학자들은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나온 철제 투구와 철판 갑을 보고 일본 선조인 왜인들의 갑옷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 왜인들은 철을 가공할 기술이 없었다. 거꾸로 당시 한 땅의 변한이 철을 생산, 수출하였다. 이런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변진(弁辰) 조에도 나온다. 철정은 철을 가공하고 제련하는 핵심 원자재인데 가야 지역에서 대량으로 나오고 있다.

아울러 일본 고분에서 나온 철재 말과 관련된 마갑(馬甲)과 철제 말머리 가리개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倭)에 대한 문헌 기록에는 그곳에는 ‘소’와 ‘말’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삼국지 『삼국지(三國志)』 변진(弁辰) 조에는 그들은 ‘소’와 ‘말’을 탄다고 기록돼 있다. 김해 대성동 무덤 떼에서는 기마민족의 이동 상징인 구리로 된 솥(동복)이 나왔다. 이는 가야가 철기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기마민족이었음 말해준다.

▲ 북방 기마민족 유물(좌), 가야 대성동 고분군 출토 유물(우) 비교
▲ 북방 기마민족 유물(좌), 가야 대성동 고분군 출토 유물(우) 비교

당시 열도에는 말과 철이 없었고 전쟁 무기도 나무로 된 활뿐이었다. 이는 일본 열도 고분시대에서 보이는 철재 투구와 갑옷 그리고 말과 관련된 기마민족의 유물과 유구들은 그 지역의 토착인들인 왜(倭)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 큐슈 후쿠오카시(福岡)의 다케하라(竹原) 고분에서는 이런 철기 기마 문화가 어떻게 일본 열도로 이동해왔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배에서 말을 내리고 있다.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배에 말을 싣고 일본 열도로 온 기마민족임을 밝혀주고 있다.

일본 고분에서는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같은 환두대도(環頭大刀), 철기 마갑(馬甲), 말머리 가리개, 철기 갑옷, 장신구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들이 한반도 가야 지역에서 이동한 기마 민족들이며 일본 열도를 지배한 고분 시대의 지배 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큐슈 후쿠오카 다케하라 고분의 채색벽화, 중앙은 가야의 철기 말머리 가리개 (김해박물관). 오른쪽은 이와 유사한 5∼6세기 일본 열도에서 출토된 말 가리게(오오타니고분 출토)
▲ 큐슈 후쿠오카 다케하라 고분의 채색벽화, 중앙은 가야의 철기 말머리 가리개 (김해박물관). 오른쪽은 이와 유사한 5∼6세기 일본 열도에서 출토된 말 가리게(오오타니고분 출토)

농경의 상징은 ‘소[牛]’다. 당시 일본 열도의 왜에는 농경의 상징인 ‘소’도 없다. 또한, 기마민족의 상징인‘말’도 없었으며 이런 모든 문화를 가야인들이 한 땅에서 일본 열도로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왜(倭)의 문화적인 수준이 어떠했는지는 중국 양나라의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그림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국에 온 왜 사신의 모습을 보면 봉제선도 없이 천 하나로 대충 묶어서 만든 옷을 입고 있다. 맨발 상태로 중국 황제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진서(晉書)』에 기록된 ‘왜’의 문헌 기록에 묘사된 모습과도 정확히 일치하며 이를 통해 당시 왜(倭)의 문화적 수준을 알려주고 있다.

▲ 좌측 양직공도(梁職貢圖)의 ‘왜’ 사신의 모습과 이를 모사한 우측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 남방계 조몬인으로 추정된다.
▲ 좌측 양직공도(梁職貢圖)의 ‘왜’ 사신의 모습과 이를 모사한 우측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 남방계 조몬인으로 추정된다.

 

출처: 전준호, 「가야의 일본열도 진출과 일왕가의 성립」 논문 요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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