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 시대에는 한 땅과 일본 열도가 붙어있어 오감이 자유로웠다.

 

일본 열도에 벼농사와 청동기를 정착시킨 것은 단군조선인들

이미 동남아지역에서 올라와 정착한 죠몽인들이 수렵채집생활

일본 구주 요시노가리 집단 거주지역은 조선사람들의 생활터

묘장제는 주로 한 땅서 가져간 옹관묘와 고인돌이 주류 이뤄

야요인들로 알려진 세력은 사실 조선인으로 열도 전체로 퍼져

 

 

▲ 일본 큐슈 요시노가리 옹관묘(좌)와 전남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우)
▲ 일본 큐슈 요시노가리 옹관묘(좌)와 전남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우)

 

한 땅(한반도)과 일본 열도는 신석기 시대에는 서로 붙어있어 쉽게 한 땅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할 수 있었다. 물론 대한해협이 넓지 않아 작은 배로도 건너갈 수 있었다.

일본 열도가 오늘날과 같이 벼농사를 하고 청동기를 쓰고 수많은 신사를 지어 문명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단군조선인들(이하 조선인)의 열도 이주 후부터다. 서기전 3백 년에서 서기 3백 년까지는 한 땅 조선인들의 열도개척 시대였다.

벼농사 기술과 청동기를 가지고 열도를 개척여 정착하였는데 이미 열도에는 다른 종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죠몽(縄文)족이라고 하였다.

자신들의 조상이 아주 오래전인 대략 1만 4천 년경에 동남아시아 라오스나, 말레이시아에서 왔다고 하였다. 너무 오래됐고 입으로 조상들이 전해 준 것이라서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인들이 그들에게 무엇해서 먹고사냐고 물으니 사냥도 하고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이 주식이라고 하였다. 집도 냉기를 피하고자 땅에서 떨어진 채로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지었다. 습하고 비가 많이 와 지붕도 경사가 크게 하여 바로바로 물이 빠질 수 있게 하였다.

조선인들은 가지고 온 볍씨로 농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밭 벼농사를 하였다. 산에 불을 질러 걸음이 생기게 하여 지었다. 평지를 찾아서 논을 만들어 물 벼농사도 시도하였다.

벼농사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해야 효용이 있으므로 대규모로 모여 살았다. 요시노가리(吉野ヶ里よしのがり)에 집단 거주지를 마련하고 한 땅에서 가지고 온 작물과 기술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청동기와 토기를 만들었다.

또 인구가 많은 공동체다 보니 여러 가지 사람 간에 갈등이 생겨 이를 중재하고 풀어주는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것은 인정하는 징표로 거울과 청동검 그리고 곡옥을 바쳤다.

이것은 단지 외적인 것이고 지도자가 되려면 영성이 있어야 했다. 알 수 없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귀신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신의 힘으로 치료할 줄 알아야 했다.

따라서 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을 추대하여 공동체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 한반도 옹관묘의 이동과 요시노가리 요적과 한반도 유적 비교(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2008, 한겨레 제공 2008, 플러스코리아 제공 2007)
▲ 한반도 옹관묘의 이동과 요시노가리 요적과 한반도 유적 비교(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2008, 한겨레 제공 2008, 플러스코리아 제공 2007)

 

사람이 죽자 장례를 치러야 했는데 한 땅(한반도)에서 쓰던 묘제를 열도에서도 활용하였다. 항아리(옹관) 묘를 사용하였고 구주지방에는 고인돌도 활용하였다.

항아리 묘제는 한 땅 평양에서부터 서해안을 따라 전라도까지 사용하는 것으로 이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장인들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열도로 이주해 올 때 항아리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 사람들도 건너왔다.

도이가하마 (土井ヶ浜 どいがはま)지역의 조선인들은 시신을 묻을 때도 고향인 한 땅 쪽으로 머리를 두었다. 아무리 고향을 잊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여 살겠다고 떠나왔다고 하더라도 고향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름도 한 땅에서 사용하던 상징개념을 사용하여 아홉 개의 주로 나눴다고 하여 구주 九州라고 지었다.

열도정착에 성공하고 열도 사람이 되어가면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야요이인(彌生人) 이라는 독립된 이름을 붙였다. 이어 동쪽으로 혼슈(本州:ほんしゅう)로 점차 개척지를 넓혀 나갔다.

현재 구주에는 가라쓰(唐津:からつし)와 가야산(可也山:かやさん)이라는 가야계 지명과 김수로왕이 거북이를 타고 왔다는 묘견신(妙見神)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이름은 열도 전역에 다수 존재한다. 이는 야요이 시대부터 고분시대까지 가야인들이 열도에 정착한 것을 말해준다.

한자 지명과 관련하여 가라쓰를 당진(唐津)이라고 기록하지만 이를 발음할 때는 가라쓰(からつし)라고 읽는다. 이는 즉 가야계 지명이다. 아울러 갸야산(可也山:かやさん)도 山을 야마(やま)로 써야 하지만 그렇게 쓰지 않고 ‘가야산’으로 발음한다. 이는 우리말의 이두식 표기임로 볼 수 있다.

▲ 한 땅을 통하여 일본 야요이(단군조선) 문화가 전파되었다.
▲ 한 땅을 통하여 일본 야요이(단군조선) 문화가 전파되었다.

 

출처: 전준호, 「가야의 일본열도 진출과 일왕가의 성립」 논문 요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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