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을 대접하지 않는 국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순국선열기념일인 11월 17일은 일제가 외교권 강탈한 을사늑약 체결일

순국선열의 날은 이미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차 임시총회에서 제안

광복을 못 보고 사망한 의사와 열사의 후손들, '순국선열유족회’ 결성

1958 결성된 순국선열유족회,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강제 해산

박정희가 광복회를 만들면서 순국선열유족회를 산하로 통합해 유명무실

정부의 냉대와 무관심 속, 지하 공간에서 사비로 겨우 명맥만 이어가

▲ 순국선열유족회는 서대문 형무소 자리 아래 공원내에 위치해 있다.
▲ 순국선열유족회는 서대문 형무소 자리 아래 공원내에 위치해 있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날'입니다. 순국선열 위패봉안 관이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있는 것을 아십니까?. 순국선열 2,835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 자리입니다.

2018년에 개정판이 나온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 순국선열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순국선열의날과 순국선열유족회

'순국선열의날'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11월 17일이란 사실을 아는 국민은 더욱 적을 것이다. 11월 17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 국민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날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 당한 날이다. 대한제국의 공식 강점은 1910년 8월 29일이지만 사실상 1905년 11월 17일에 대한제국은 망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는 독립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 35년이 아니라 4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순국선열의날을 정한 주체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1939년 11월 21일 임시의정원 제31차 임시총회에서 지정천池靑天, 차리석車利錫 등 6명의 독립운동가가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하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임정은 가능한 한 을사국치의 날에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행사를 했다. 해방 이후에는 단독으로 행사를 하기도 하고,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먼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개념부터 정리해보자. 간단하게 정리하면 순국선열이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뜻하고, 애국지사는 살아서 8.15 광복을 맞은 분들을 뜻한다. 즉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순국선열이고, 해방 때까지 살았던 분들이 애국지사다.

의사義士와 열사烈士와 지사志士의 개념도 정리해보자. 의사와 열사는 순국선열이고 지사는 애국지사라고 보면 된다. 의사와 열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사는 무력이나 직접 행동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 즉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 같은 직접 행동가를 뜻한다.

원래 무력 사용이 임무인 군인에게는 이 호칭을 쓰지 않지만 의병중장 안중근을 의사라고 하는 것처럼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열사는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일제와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유관순, 이준 같은 분들을 뜻한다. 지사는 1945년 8월 15일 밤 12시 이후까지 생존하셨던 분들이다.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신 의사와 열사의 후손들이 만든 단체가 '순국선열유족회'다. 그런데 2013년 순국선열유족회가 대통령에게 「순국선열에 대한 건의」를 했는데, 그 요체는 3.1절, 광복절 행사에 '순국선열유족회장'이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순국선열유족회장은 어떠한 정부 행사에도 초청받지 못한다. 또한 순국선열유족회는 1989년부터 『월간 순국』이란 월간지를 발간하고 있는데, 필자도 처음에는 당연히 출간비가 국고로 지원되는 줄 알았다.

마찬가지로 순국선열유족회도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단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순국선열유족회는 국고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순국선열유족회의 김시명 회장의 가장 큰 걱정은 11월 17일 '순국선열 추모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다. 순국선열유족회에서 관리하는 시설이 '대한민국 순국선열 위패봉안관'인데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있다.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 자리에 지었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단층 건물이다. 지상 54평(179.45㎡)은 순국선열 위패봉안실로 사용하고 있고, 지하 114평(375㎡)은 사무실, 자료실, 교육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국선열 2,835위가 봉안된 공간이 아파트 한 채 공간인 54평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아직도 지하실에서 추모 사업 논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위패봉안 관이 너무 협소해서 순국선열 추모제는 야외에서 해야 하는데 11월 17일이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라 상황이 녹록지 않다. 초청 인사는 물론, 유족 중에는 연로한 후손들이 많아 난방이 꼭 필요하다. 2012년에는 서울시에서 2천만 원을 얻어 겨우 행사를 치렀다.

그런데 2013년에 다시 지원금을 신청했더니 서울시장이 인권 관련 단체나 행사만 지원하라고 한정하는 바람에 예산 목적 분야의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시장이 이런 세부사항까지 알 수는 없겠지만 순국선열 추모 사업과 인권 관련 사업이 서로 대척점에 서야 하는가?

외교권을 빼앗겼던 1905년 11월 17일로부터 110여 년이 지났지만, 그날처럼 매서운 추위를 두려워하면서 순국선열 추모제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 중국 등의 반발을 아랑곳하지 않고 침략 전쟁 중에 죽은 병사들의 혼을 야스쿠니 신사에 국보처럼 모시고 있는 일본이 한국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겠는가?

필자는 이해 못 할 현상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역사를 뒤적거린다. 답은 그 안에 있다. 1959년 비영리법인으로 허가받았던 순국선열유족회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강제 해산당했다.

순국선열유족회를 강제 해산시킨 쿠데타 세력의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의 부족을 메우는 방법의 하나로 독립운동가 선양 사업을 선택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순국선열의 수를 학계에서는 15만 명 이상으로 보는데, 실제 서훈자는 3,291명이다. 순국선열의 3배쯤으로 보는 애국지사 중 실제 서훈자는 9,876명뿐이다.

이승만 정권 12년 동안 서훈자는 딱 2명이었다. 이승만 자신은 받아야 하니까 1949년에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만들면서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 둘이서 수상했다.

이승만 혼자 받는 것이 모양이 우스우니까 이시영을 끝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1953년 방한한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에게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12년 동안 이렇게 딱 3명만 서훈했다. 앞서 김승학 선생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게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라고 말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한때 독립운동가들을 주축으로 상원 격인 원로원을 만들려고까지 했는데, 1962년 삼일절 때 의병장 최익현 선생을 비롯한 김구·안중근·윤봉길·이봉창·김창숙·조만식·안창호·신익희 선생 등 18명에게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것을 비롯한 대통령장 58명, 국민장 128명 등 모두 204명을 서훈했다.

이렇게 박정희 군사 정권에 의해 독립운동가들 서훈의 길이 열린 것도 대한민국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수훈 애국지사와 그 유족 중 연금을 받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1965년 2월 27일 사단법인 '광복회'를 탄생시켰는데, 이때 순국선열유족회를 광복회에 통합시켜 버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독립운동한 것이 죄"였던 이승만 정권 때보다 박정희 정권에서 광복회를 만들어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유족들에 대한 보훈 사업을 한 것은 경위나 속내야 어쨌든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순국선열 선양 사업과 그 후손들에 대한 보훈 사업이 애국지사의 그것에 비해 크게 뒤지는 역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보훈처 공훈록에서 100인을 무작위로 뽑아 사망 연도를 평균해보았더니 순국선열은 1920년인 반면 애국지사들의 평균 순국 햇수는 1954년이었다고 한다.

애국지사의 후손들도 해방 후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평균 1920년에 사망한 순국선열 유족들의 후손들은 더욱 어렵게 살았다. 순국선열 유족들의 경우 정규학교를 마친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박정희 정권 때 설립된 광복회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를 운용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기념사업을 하는데 이를 '순애기금'이라고 한다.

순국선열유족회가 보훈처로부터 정보 공개 요청을 해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보훈처에서 최근 10년 동안 순국선열과 그 후손들의 생활 지원을 위한 사업에는 약 3%를 사용했지만 애국지사와 그 후손들의 선양 사업에는 약 97%를 사용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에서 광복회만을 독립운동 기념 법정 단체로 인정하는 보훈 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보훈처는 광복회만 공법 단체라는 이유로 광복회만 직접 상대한다.

광복회만이 법에 규정된 공법 단체라는 것이다. 유독 건국 공로 관련 공법 단체만 하나를 고집하는데, 보국 공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대한민국 전몰군경 유족회, 대한민국 전몰장병 미망인회 등이 있으며, 4·19 혁명 관련 단체로는 4.19 민주혁명화, 4.19 민주혁명희생자유족회, 4.19 혁명공로자회 등이 모두 공법 단체다. 유독 독립운동 관련 단체만 광복회로 단일화시켜 놓았다.

물론 광복회가 모든 독립운동 관련 조직을 포괄하는 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광복회는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고 친일 문제 비판에도 소극적이란 비판을 여러 차례 받았다.

또한 광복회는 회장이 임명하는 약 30%의 임명직이 현 회장에 대한 재신임 투표권을 갖고 있는 비민주적 구조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독립운동 기념사업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광복회가 성역화되는 역 현상이 발생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밖은 물론 안에 있는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 한다.

광복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순국선열유족회를 공법 단체로 지정해서 광복회와 선의의 경쟁을 시키는 것도 해결책의 하나가 될 것이다.

현재 광복회는 친일파로부터 환수한 순애자금 450억을 들여 광복회관 재건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광복회관은 2006년에도 국비 30억 원을 투입하여 개조한 건물이다. 광복회는 광복회관을 개축해 독립운동 후손들의 복지 시설로 사용하는 한편 수익금을 후손들의 복지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54평에 불과한 위패봉안관 증축 사업은 설계도 그릴 돈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순국선열유족회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에 광복회관 재건축 비판 및 친일파 환수금 운영 주체 변경을 요청했는데, 답변은 천편일률적으로 '보훈처에 이관했다'는 것이다.

보훈처는 광복회와만 손잡고 이 막대한 자금의 사용을 집행한다. 그동안 독립운동가 선양 사업이 부진하다는 비판의 열매를 광복회만 독식하면서 사실상 성역으로 유족들 앞에 군림해왔다.

그러면서 회장이 투표권자 30%를 임명하는 비민주적 행태가 반복되어왔다. 누가 입후보 자격이 있는지 광복회원들도 모른다.

이제 이런 문제도 민낯을 드러내고 공론화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독립운동가 기념사업마저 비정상인 상태에서 남 탓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출처: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2018, 만권당, 481~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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