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어온 종교는 본토 토속문화에 겸손해야 한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제주43학살 47년전 이미 대규모 민중 참사 벌어져

제주도 천주교도들 고종 권세 믿고 살인, 강간, 약탈

온갖 폐악질 일삼아도 교당으로 숨어버리면 처벌불가

교당 지으면서 신당, 신목 등 토속문화 파괴 말살해

관노였던 무술 출중한 이재수를 중심으로 뭉쳐 반격

상무사조직, 포수 등 수천명 무장봉기 제주성 장악

패악질 일삼은 천주교도 300여명 참살 후 내다 버려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삼의사 비에는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라고 적혀

 

▲ 이재수의 란으로 알려진 신축민란은 외세와 조정을 등에 없은 제주 천주교도들의 패악질에 참다못해 봉기한 민중의 심판이었다(편집인 주)
▲ 이재수의 란으로 알려진 신축민란은 외세와 조정을 등에 없은 제주 천주교도들의 패악질에 참다못해 봉기한 민중의 심판이었다(편집인 주)

 

<종교(천주교)가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의 비극 ... 이재수의 난>

1. 이재수의 난을 아는가? 덜 알려진 제주도 비극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천주교인과 주민들간의 충돌 사건으로 천주교도 300여명이 희생되었다.

신축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신축민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비극인 4ㆍ3사건(1948년)보다 47년 전에 제주도에 또 다른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주동자 이재수는 제주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관노였다.

그는 구한말 왕권의 비호를 받고 악행을 일삼던 천주교세력에 불만을 품고 민란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잡혀 효수당했다고 한다.

이재수의 난은 4ㆍ3 등 제주의 한을 형상화해온 현기영 작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1983)라는 소설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소설을 각색하여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한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1999)가 만들어졌다. 최초의 한불 합작 영화라고 한다.

2. 천주교는 제주에서 교세를 확대하며 양아치 짓

“여아대(如我待).”

이 증표를 가진 사람을 “나를 대하듯 하라.” 고종이 병인양요(1866)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신부들에게 줬다는 증표다.

이 증표는 결국 1901년 5월 ‘변방’이었던 제주에서 민란과 천주교도들의 학살을 가져오게 된다.

1858년 제주도에 처음 전래된 천주교는 극도로 가난한 지역 주민들의 평등 및 구원 열망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됐다.

하지만 천주교도들은 탐관오리와 결탁해 온갖 세금을 징수하는데 앞장서는가 하면

새로운 교당을 지으면서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는 등 토착문화를 말살해 반감을 샀다.

또 ‘여아대’ 패를 가진 프랑스 신부들이 주도하는 교당은 치외법권지대가 되어

신도들이 온갖 폐악질을 하더라도 교당으로 달아나면 관아에서 체포할 수가 없었다.

또 살인을 저질러도 체포는 커녕 시체검시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고, 강간이나 윤간을 당해도 아무런 항의조차 할 수 없었을 지경이었다.

1901년 2월에는 일부 신도들이 마을 유지인 훈장과 친지들을 잡아 고문하다 죽이고 범인이 교당으로 숨어버렸다.

참다못한 대정군수 채구석과 양반출신 오대현은 4월에 상무사(商務社)라는 것을 조직해 물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주교도들이 다시 상무사 위원 집을 공격했고 상무사들은 보복으로 천주교당을 습격했다.

며칠 뒤 상무사는 ‘규탄 민중대회’를 열었고 다시 양측의 충돌이 벌어졌다.

천주교도들이 무장하고 민중들에게 사격을 가해 주민이 즉사했고 지도부까지 납치했다.

3.이재수가 민란을 주도하여 천주교도 대량 살처분

평소 무예가 뛰어났던 이재수는 납치당한 지도부를 대신해 지도자로 부상했고 무장봉기를 결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40명의 포수를 비롯한 수천 명의 장정이 대정군에 모여 총칼과 죽창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민군을 둘로 나누어 동서로 돌아 제주로 진격했다.

이재수는 제주성에서 가까운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관아와 협상을 했다.

5월 25일, 성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 신부는 나흘간의 빌미를 달라고 답해 시간을 벌면서 인천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보내달라고 프랑스 공사관에 연락했다.

하지만 28일까지 함대는 오지 않았고 민군은 제주성에 입성했다.

민군은 입성 후 300여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대다수가 가톨릭을 들먹이며 행패를 저지른 자들이라 증오를 가득 받아서 이렇게 끔살당하고도 묻히지 않고 그대로 바깥에서 썩어나갔다.

31일 프랑스함대가 도착했다. 이 배를 타고온 신임목사(도지사)는 시정을 약속했고 6월 10일 민군은 자진해산했다.

이재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다.

이에 친우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학살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의 오대현도 자수했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되어 1901년 10월 9일 최초로 근대식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3. 항쟁의 흔적, 종교와 권세의 야합에 경고

이 항쟁의 주된 흔적은 민란 지도자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명의 ‘의사’를 기리는 ‘제주 대정 삼의사비’다.

첫 문장이 충격적이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2003년 들어 천주교 측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

천주교측은 서구제국주의의 한국침략기에 선교과정에서 “제주민중에 대한 과거의 잘못에 사과”했고 1901년 제주항쟁 쪽은 봉건왕조와 외세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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