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사관 잔재는 우리언어 속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시해'란 용어는 책임소재가 일제가 아닌 우리내부에 있다는 의미

'시'에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다는 뜻,  내부인이 죽였다는 뜻 포함

'명성황후 시해'란 말은 명성황후를 조선 사람들이 죽였다는 뜻

순종의 증언을 조작, 우범선이 명성황후를 죽였다고 왜곡해  선전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에 의해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오해 일으켜

 

 

▲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는 '시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다(편집인 주).
▲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는 '시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다(편집인 주).

 

■ '명성황후 시해'란 용어는 바로 잡아야 한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미우라 공사의 주도하에 경복궁에 난입,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통상 '을미사변'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국사 교과서, 각종학술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그러나 '시해'란 용어는 '일본인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란 의미를 담기에 부족하고, 나아가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소재가 '우리 내부'에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용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시해'란 용어는 다른 용어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시해'의 사전적 의미

'시(弑)'란 단어는 '신하가 자기 임금을 죽이다.'란 뜻을 가진 말로, 시역(弑逆)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다시 말해 신하가 반역의 뜻을 가지고 자기 임금을 죽였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외적의 침입'에 의해 임금이 죽었을 경우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사마광이 편찬한 사전류인 <류편(類篇)>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弑, 殺也. 自外曰狀, 自內曰弑

'시란 죽인다는 뜻이다. 외부인이 죽었을 때는 장(戕), 내부인이 죽었을 때는 시(弑)라고 한다.'

또 글자의 원뜻을 정리한 중국의 사전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시(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여 '하극상(下剋上)'의 패륜적 반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규정해 놓았다.

下殺上曰弑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것을 시라고 한다.

또 중국의 고전 《춘추(春秋)》 <좌전>에서는 좀 더 정확한 용례를 보여 주고 있다. 

凡自虐其君曰弑, 自外曰戕 - 左傳〈宣公十八年〉 

자기의 군주를 죽이는 것을 시(弑)라고 한다. 외부인이 임금을 죽인 것은 장(戕)이라고 한다. 
- 좌전 <선공 18 년>

이러한 용례에서의 의미를 참고할 때, 시(弑)는 오직 자기의 군주를 죽였을 경우에 한정하여 사용할 수 있으며, 외국인이 자기 임금을 죽였을 때는 별개로 장(戕)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시해란 용어의 부적합성

중국 고전의 용례와 사전에 입각해 볼 때, 시(弑)란 용어는 '자기 신하가 하극상을 범해 군주를 죽인 행위'에 한정해서 쓴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란 말은 '일본인의 계획에 의해 모살(某殺)된 경우에 해당하므로, '시(弑)'란 용어를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명성황후 시해'란 단어에는 명성황후를 조선 사람들이 죽였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일본인들은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 '조선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 난입했던 일본인 중의 한사람인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훗날, 사건을 회고하는 수기에서 "민비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두 개의 칼자국이었다. 누가 어떻게 죽인 것이었을까?

양복 입은 조선 사람이 지사들 사이로 섞여 들어와 칼부림을 한 것이란 소문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혜문 엮음, 《조선을 죽이다》, 동국대학교출판부, 134쪽 고 기술, 살해의 진범이 조선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명성황후 '시해' 주장의 근거

명성황후를 조선 사람이 죽였다는 주장은 대략 3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조선 정부에서 당시 군부협판(현재 국방부 차관) 이주회를 '살해의 진범'으로 체포하고, 재판을 거쳐 처벌한 기록이 있다.

둘째, 대원군이 입궐하는 과정에서 훈련대와 시위대가 충돌,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주장이다. 정교(鄭喬:1856∼1925)가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할 때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기술한 책, 《대한계년사》에는 을미사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면서 시(弑)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李昰應 以日本人及訓練隊兵 犯闕 弒王后 閔氏

이하응(대원군)이 일본인과 훈련대 병사와 함께 입궐하여 명성황후를 죽였다.

셋째, 우범선 등이 명성황후를 죽였다는 것이다. 통감대리 하세가와가 이토 통감에게 보낸 '을미사변 망명자 중, 이두황, 이범래에 대한 황제 특사 거절에 대한 청훈 건'의 보고 전문에 의하면, 순종이 하세가와 통감에게 "을미사변 당시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국모를 살해한 사람은 우범선이다."라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주장은 모두 일본에 의해 조작되거나 허위로 작성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축적된 학술 자료와 연구에 의하면, 일본이 사건을 계획하고 주도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었음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해'란 용어는 자칫 조선사람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조선 사람이 을미사변에 가담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는 용어임을 부정할 수 없다.


명성황후 '시해' 용어 사용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혹자는 시해란 용어가 정확히 맞지 않는다 해도 명성황후가 '국모'이기 때문에 시해란 용어를 써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弑)란 단어와 용례에 대한 오해일 뿐이다. 시(弑)는 왕이나 왕비의 죽음에 대한 높임말이 아니라, 반역을 일으킨 자의 패륜을 꾸짖고 경고하기 위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황후 시해'란 용어는 적절한 용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시해는 '일본인에 의해 계획된 살인'이란 의미가 포함될 수 없으며, 국모의 죽음을 격상하는 높임말도 아니다.

나아가 '시해'란 용어 속에는 조선 사람이 국모를 죽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일본의 증거 조작과 허위 문서로 인한 농간에 빠져 버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명성황후 시해'란 용어 자체만 보게 될 경우,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에 의해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이에 국립국어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 2015년 을미사변 발발 120년을 맞아 명성황후 시해란 용어의 정당성 여부를 심의하여 적절한 용어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출처: 『우리 궁궐의 비밀』, 혜문, 2015, 118~121쪽

#명성황후시해 #명성황후살해 #을미사변 #혜문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