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부친 박성빈은 조선왕조 무관으로 동학혁명에 가담하였다.

글: 전집현(역사연구가)

아버지 박성빈

조선왕조 군관으로 부패상에 환멸 동학혁명참여

역적으로 처형위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셋째 아들은

대일항전에 뛰어들어 신간회, 조선건국동맹활동,

해방 후 10.1 대구 투쟁 등 하다가 체포돼 사형당해

막내아들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나와 특설대 활동, 해방 후 광복군 잠입, 남로당 가입  군사총책, 여순봉기, 4.3학살 등 과정에서 발각, 처형위기서 백선엽이 구출

박정희 부친 박성빈. 조선왕조 군관이 었으나 동학혁명에 참여 하였다.
박정희 부친 박성빈. 조선왕조 군관이 었으나 동학혁명에 참여 하였다.

<동학농민전쟁, 대구항쟁, 여순사건과  연루되어 풍비박살날뻔 한 집안>

1. 아버지 박성빈 : 동학농민운동중 구사일생

경북 성주군 출신 박성빈(1871~1938)은 구한말 무관직 말단인 효력부위(効力副尉:정9품 무관, 육군 소위)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때 당대의 부패상에 대해서 일찌감치 환멸을 느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농민운동이 진압되면서 역적으로 취급받아 처형될 처지에까지 내몰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천운으로 살아남았다

2. 세째 아들 : 좌익계열, 대구항쟁직후 사살

박성빈은 5남2녀를 두었는데, 세째아들 (1905~1946)은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 언론가로써 1927년 신간회 참여,  1934년 중앙일보 기자 생활,  일제 말기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자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1946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되었다.

그러다가 미군정 하에서 식량난과 토지개혁 지연, 친일 관리 중용 등 모순이 지속되자 성난 민심이 폭발한 이른바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경상북도 일대에 시위가 확산되자, 그는 선산-구미 지역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대구지역을 유혈진압한 뒤 선산으로 진입한 경북도경 - 경기도경 연합부대에게 총살된다.

3. 막내아들 :  여순사건 연루, 무기징역에서 구제

막내아들(1917~1979)은 만주군 육군장교(1944), 한국광복군 장교(1945),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1946)로 활동하였다.

그는 세째형의 사살로 인한 복수심과 형 친구 이재복(남로당 군총책)의 권유로 1946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에 가담했다.

그는 국방경비대(국군)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이후 김창룡이 주도한 군내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숙군 작업에서 11월11일 체포되어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같은 만주국 출신이자 당시 육본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상관 백선엽 대령 등에 의해 구제되어 예편되었으며 전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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