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전쟁의 환경이 열악함에도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는 위업을 이루어 냈다.

글: 전집현(역사 연구가)

 

임시정부 요청, 장개석 허락받아 광복군 창설

장개석 군대 예속 벗어났으나 군대 병력수 열세

지원 조건으로 중국 용병된 광복군,  지원은 찔끔

일제에 선전포고 국내 진공작전, 일제 항복으로 무산

 

▲ 비록 중국군의 지원을 받아 창설됐지만 임시정부는 군대를 정식으로 갖게 되었다(편집인 주)
▲ 비록 중국군의 지원을 받아 창설됐지만 임시정부는 군대를 정식으로 갖게 되었다(편집인 주)

 

 

광복군(光復軍) : 장개석 군대의 통제를 받던 일개 부대에서 벗어났으나, 자력 국토탈환에 실패>

1. 장개석의 허락을 받아 광복군 창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래 임정은 창사에서 광저우·루저우·치장 등 중국 각처로 전전하다가

그러다가 1940년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 정착한 후 광복군을 창건하려 했다.

임정은 중국 정부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어, 광복군 창설도 양해와 허락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1940년 5월 임정은 국민정부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에게 한국광복군 결성을 허락해줄 것을 교섭하였고, 이를 허락받았다.

1940년 9월 17일 임정은 충칭 한 호텔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成立典禮)를 가지고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이 취임했다.

이로써 1919년 임정을 수립한 지 21년 만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하지만 간부 9명 가운데 7명이 임정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다.

이처럼 총사령부 간부진을 편성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병력을 모집하는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해

중국 몇몇 지역에서 초모공작을 펼쳤으나 1년뒤 240명이 사실상 전부였다.

1945년 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

이는 194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인학도 육군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에 따라

의용군에 입대한 조선인(4,385명)들에 비해서도 턱없이 적은 숫자이다.

2. 중국 지원 조건으로 중국 용병이 된 광복군, 근데 지원은 찔끔

광복군 창설 자체에 미온적이었던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41년 11월 중국군 군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에 "한국광복군 행동준승(韓國光復軍行動準繩)" 9개항을 요구했다.

준승에 따르면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돼 인사·경리·훈련·공작 등 모든 사항에서 중국군의 명령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특히 8항과 9항은 모욕적인 조항으로 중국 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광복군의 작전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당정부의 이 행동준승에 분개했지만,

김구는 1941년 12월 1일 수락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수물자의 충당을 일단 해결했다.

이리하여 광복군은 독립군이 아닌 ‘장립군(蔣立軍)’이 되었다.

그럼에도 국민당정부의 재정원조는 미미했다. 1941년 12월에는 6만 위안이었다. 이 액수는 광복군을 유지하는데도 절대 부족했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3. 중국 예속은 벗어났으나 병력수나 세력은 미약

임시정부는 이후 국민당정부에 행동준승의 폐지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1944년 8월 23일 국민당정부는 행동준승을 폐지했다.

이와 함께 광복군에 대한 국민당정부의 지원도 중단됐다.

그러자 광복군총사령부 소속 장교 18명 가운데 10명이 사임했다.

중국의 지원이 없으면 당장 호구지책이 막연했기 때문이다(중경에 임정 요원과 가족 등 거주 한국인은 600명이었는데 국민당정부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이 임정 주석 김구에게 이양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4월 4일 새 협정인 한국광복군 중한양방상정 판법(韓國光復軍中韓兩方常定辦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르면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다고 규정되어 있고, 재정 원조는 차관(借款)으로 한다고 했다.

4. 일본에 선전포고, 국내진격작전 시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했다.

태평양전쟁이 무르익어 가면서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 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를 대상으로 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 설치, 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한편 중국에 파견돼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는

만주, 한반도, 일본 등지로 다수의 첩보원을 침투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그 계획을 수행할 한국인 요원도 모집했는데,

광복군은 이러한 OSS와 협약을 맺었고 요원들은 특무공작 훈련을 받았다.

그 뒤 1945년 8월 4일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 50여명이 배출됐다.

이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국내 진공 작전’이 수립되었으나, 수립 1주일만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됐다.

# 독립군가

*미국 남북전쟁 당시 쓰인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라는 곡을 썼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 길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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