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이 대일독립전쟁을 주도하였다.

 

글: 류돈하(역사연구가)

 

서간도의 경학사 규모와 체제는 작은 나라와 같아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왕산 허위 집안이 주도

퇴계, 율곡, 학봉 김성일 계통 잇는 집단으로 구성

을사늑약 이후 나라 기울자 새로운 나라 건설 추진

1920년 경신참변까지 2천여 명 배출 각 분야 진출

신흥무관학교 출신, 청산리, 봉오동전투, 의열단 활약

경학사 주도한 석주 이상룡,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상해임시정부로 통일하여 대일 독립투쟁 토대 구축

신라중심사관에서 단군조선->고구려로 계승 사관

상해임시정부 법통 계승한 대한민국의 국부 자격

 

▲ 만주 서간도에 건설한 신흥무관학교 교사와 학생들(편집인 주) 
▲ 만주 서간도에 건설한 신흥무관학교 교사와 학생들(편집인 주) 

 

문.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을 꼽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

답.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 1천년래 제일의 대사건을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으로 지정한 바 있다.

단재의 관점이 아닌 나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 1천년래 제일의 대사건을 꼽자면 1911년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이라 하고 싶다. 이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일본은 강화도 수호조약이 체결되는지 30여 년 만에 마침내 조선을 병탄하게 된다. 그 시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었다. 을사년의 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많은 충의지사 들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가 하면 의병을 일으켜 열렬히 저항하였다.

1894년 갑오년에서부터 시작되는 의병은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이 창의한 것이다. 특히 경상도를 위시한 영남의 의병 활동은 위정척사의 성격에서 발전하여 국권피탈 후 여러 성격의 독립운동 양상을 보인다.

그중에서 신민회 활동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이 기정사실로 되자 아예 국외를 떠나 망명하여 새로운 독립기지를 물색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창호, 양기탁 그리고 안동의 석주 이상룡이었다.

석주 이상룡은 경북 안동이 고향이며 고성이씨 참판공파 종택인 임청각의 종손이다. 그는 서산 김흥락으로부터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통 유학자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시대정신에 밝았고 민주적인 의회와 지방자치 제도를 주장한 민주주의자였다. 석주 이상룡은 나라가 일본에 병탄당한 후 오랑캐의 땅이 됨을 슬퍼하며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힘쓰고 새 나라의 건설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여정은 1911년 1월에 시작하였다.

임청각을 떠나 자신의 인생 중 안동에서의 마지막 밤을 하회마을에서 보내고 서울,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인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뜻을 함께한 사람이 서울 종로의 양반 귀족 우당 이회영이다. 우당은 이보다 앞서 신민회 회원으로 독립기지를 건설한 후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지정하였다.

그는 이미 을사늑약 이후 1907년 늑약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전파하고자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의 특사를 파견하는 그 배후에 있던 인물이다.

▲ 신흥무관학생들과 교사들이 영농을 하여 자급 자족의 생활을 하였다(편집인 주).
▲ 신흥무관학생들과 교사들이 영농을 하여 자급 자족의 생활을 하였다(편집인 주).

 

한편 우당은 석주와 뜻을 같이하고 6형제 가족을 대동하여 집단 이주하였고 석주 역시 처남인 백하 김대락 등 일가족 40여 명과 함께 이주한 것이다.

석주와 우당의 만남은 그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석주와 우당으로 대표되는 두 집단의 연합은 우리 역사를 뒤흔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전의 역사를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석주는 그 본인이 퇴계의 정맥학통일 이은 영남학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으며, 우당은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정통 서인 세력의 중심인물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집단의 결합과 연합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 가세한 다른 한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구미 선산 임은동의 왕산 허위 집안이다. 왕산 집안의 학맥을 논하자면 석주와 마찬가지로 영남학파에 속하면서도 석주가 호파라면 왕산은 병파에 속한다.

호파는 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일컬으며, 병파는 서애 류성룡의 학맥을 뜻한다. 방산 허훈, 왕산 허위는 국권피탈 이전에 병사, 순국하였고 그들의 아우인 성산 허겸이 석주와 뜻을 같이하면서 이들 세 가문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3대 명문가가 되었다.

영남학파 즉 남인과 서인의 연합은 1575년 을해당론으로부터 시작된 조선 붕당정치의 결론이자 그 결실이 다름 아닌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이다. 그래서 일대 사건이라 하는 것이다.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에 모인 조선의 망명인들은 1911년 4월 우선 석오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5개의 조항을 채택한 후 경학사를 창립하였다.

경학사의 초대 사장은 우당의 형 이철영이며 석주는 부사장이 되었다. 경학사는 내무, 농무, 재무, 교무 등 4개 부서로 조직됐다. 농업, 상업, 공업 등의 경제활동을 통해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과 군사 양성에 힘쓴다는 취지였다.

이는 서간도에서 작은 조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경학사의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니 이 기관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경학사는 훗날 부민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12년 그 학교의 교사를 봉천부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하여 마치 성의 해자처럼 요새화시켜 교육을 이어나갔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후 1920년 경신참변 이후 폐교하기까지 졸업생 2천여 명을 배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애국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르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이 배운 과목으로는 민족의 역사인 국사, 국어, 지리, 한문, 물리, 화학, 체조, 군사 등이 있다. 이는 동양의 전통 학문과 서양의 신학문을 조화롭게 배합하여 지정한 것이다.

졸업생들은 졸업 후 독립운동의 여러 부문 가운데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의 졸업 후 펼친 광복 활동은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특히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의 주역이 되었으며, 의열단원으로도 활약한 졸업생들도 많았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신흥무관학교를 대한민국 항일독립운동사의 요람지라 하는데 이는 과연 타당하지 않을 수 없다.

▲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그는 독립투사이자 역사학자였다(편지인 주).
▲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그는 독립투사이자 역사학자였다(편집인 주).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혁명가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들은 그 정치적 성향이 좌파, 우파 모두 있겠으나 그것을 차치하면 신흥무관학교야말로 명실상부한 민족학교이자 생도들이 군사로도 활동함에 우리나라 국군의 전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생도들을 가르친 교관들의 다수가 대한제국 무관인 것을 감안하면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의 맥을 잇고 새로운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잉태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석주는 유학자이자 독립 무장 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정치지도자이기도 하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역사학자로서의 석주이다. 석주의 저서로 대동역사가 있는데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 교과서로도 사용되었다.

대동역사는 신라 중심의 사관에서 탈피하여 단군조선-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본류이자 정통으로 정립하는 의미를 지닌 역사책이다. 그에 따라 단군조선, 고구려의 옛땅인 서간도가 실은 우리의 고토인 것을 밝힌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2절에 나오는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라는 대목은 이러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반영하였다.

1920년 이후 일본은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 석주는 여러 곳으로 이주를 해야 했으며, 그 집안의 살림은 손자며느리 허은이 도맡아야만 했다. 임청각의 19대 종부인 허은 선생은 왕산 허위의 사촌 범산 허형의 손녀이다. 또 석주의 손자사위가 왕산 허위의 아들 허국이니 양 집안은 겹사돈의 혼맥을 가진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석주의 활동은 대한민국사에도 주목할만하다. 당시의 독립운동 노선이 무장 투쟁노선, 외교 노선으로 양분되어 있다면 이들의 분열을 극도로 비판하며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양측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상해의 임시정부를 우리의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 중심으로 광복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논지이다.

그래서 서간도에 있던 석주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변장까지 해가며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변모한 까닭은 이승만의 탄핵이 주원인이며 이것의 보완을 위해 내각제 성격을 포함한 국무령제가 실시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우리 대한민국의 법통이 되며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비추어본다면 석주가 우리 대한민국의 국부라 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2022년은 석주의 순국 90주기인 것 역시 능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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