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가톨릭에 반발해 탄생한 교회가 오늘날 더 타락해 있다.

 

글: 박황희(고전번역학자)

 

공자의 인간에 대한 배려 지침은 지금도 유효

기독교 신앙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자기 부정’

성경은 이성 마비가 아니라 이성 회복에 있어

‘문자주의’, ‘근본주의’ 이성 마비시켜 비난 자초

성경은 소문 듣고 기록, 정치 목적으로 채택된 것

오늘날 교회, 십자가 버리고 돈벌이에 치중, 타락

 

▲  오늘날 한국 교회는 복음전파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회 다니길  전파하고 있다(편집인 주).
▲ 오늘날 한국 교회는 복음전파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회 다니길 전파하고 있다(편집인 주).

 

[한국 기독교의 반지성주의]

자공이 물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의 허물을 떠들고 다니는 자를 미워하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헐뜯는 자를 미워하고, 용감하지만 예의염치가 없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주장은 고집스럽게 주장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을 미워한다.”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孔子曰: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자공)야,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남의 생각을 표절하여 자신의 지혜로 삼는 것을 미워하고, 불손한 행동을 용기로 여기는 것을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짓을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합니다.”

[曰: “賜也, 亦有惡乎?” 子貢曰: “惡徼以爲知者, 惡不孫以爲勇者, 惡訐以爲直者.”]

- 『論語』 「陽貨」

목사가 풍년인 시대에 살고 있다. ‘머리 깎았다’고 다 중이 아닌 것처럼 ‘교회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다 성불한 것이 아닌 것처럼 목사라고 해서 다 예수를 닮은 것도 아니다.

입만 열면 하느님을 말하고 걸핏하면 성경을 들먹이지만, 정작 예수가 어떤 분인지조차 모르는 무당 목사가 도처에서 선지자 노릇하는 위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personality’에 있는 것이 아니라 ‘value’에 있다. 술·담배 끊었다고 거듭나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욕과 칠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내 안의 위선과 가식을 직시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오직 믿음’, ‘절대 긍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에 있다. 자신의 일천한 경험을 보편화하여 그것이 마치 성경의 절대기준 인양 호도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자신의 사고와 안목의 지평을 넓혀서 역사와 자신을 객관화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왜곡된 신념은 고착되어 끊임없는 오류를 반복 재생산해내고 말 것이다.

소위 목사랍시고 종교지도자를 자처하는 인생들에게 권면하고 싶다. ‘신학’을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인간학’에 통달하라. ‘神’을 안다고 주장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人間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균형 감각을 갖춰라.

성경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계시를 이성의 영역으로 깨달을 수 없다 하더라도 결코 상식의 구조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신앙의 힘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생활 속의 신앙은 이성과 대화하고 과학과 소통해야만 한다.

‘성경 문자 주의’나 ‘근본주의’의 신앙은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무지를 충동질하는 영적 홍위병 노릇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여전히 ‘미토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술적 신앙에 불과하다.

나는 한국의 ‘교회주의 기독교’를 부정한다. ‘하느님’은 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느님을 마치 자신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쯤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경은 신이 인간에게 직접 전해 주신 ‘계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일 뿐이다.

더구나 문하의 제자들이나 친견 목격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기록물도 아니다. 종이가 없던 시절 원본 없이 구전된 것을 후대가 양피지에 필사하여 다양한 필사본으로 전승되었다가 예수 사후 3세기가 지난 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밀라노 칙령으로 27권만을 캐논으로 인정하여 비로소 정경이 탄생 되었던 것이 역사적 고증이다.

기독교는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거 하는 ‘그분’을 믿는 것이다. 유대교의 전통이나 바울의 기독론을 절대 진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기록을 통해 그분의 정신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가 살던 시대의 동시대 사람을 위해 쓴 것이지 이천 년이 지난 현세의 인류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컴퓨터로 국경을 넘나드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살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간에서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 진리를 오늘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지나치게 ‘성경 문자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오직 성경만이 절대 진리라 주장하며, 나머지 인류의 보편적 지혜를 부정하고 천시한다면 맹신과 광신이 되어 반드시 ‘全狂訓’ 류나 ‘金三患’ 류에 세뇌된 채 독단의 도그마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집착하는 반지성적 교조주의자들이 자신이 ‘성경 자폐’에 빠져 영적 장애인이 된 줄도 모르고 일요일만 되면 종교시설에 넘쳐나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교권’을 절대시하던 중세 카톨릭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어처구니없이 ‘교권’ 대신 ‘성경’을 절대시하며, ‘성경’을 우상숭배 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트가 프로테스탄트인 이유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절대적 하느님 이외의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 끊임없이 프로테스트(protest) 하는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궁극적 깨달음의 세계’이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인간학’에 대한 고뇌와 성찰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목사와 장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인격과 도덕성의 우위를 담보해 주지 못한다. 인격과 도덕성이 형편없는 종교인을 우리는 신물 나도록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앙은 ‘배타(排他)’가 아니라 ‘이타(利他)’가 되어야 한다. 죽이는 것은 ‘율법’(문자)이고 살리는 것은 ‘영(Spirit)’이다. 예수의 교훈은 ‘공생(共生)’이나 ‘상생(相生)’ 정도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의 제물로 드리기까지의 ‘이타적(利他的)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예수를 만났다면 감히 함부로 신분을 주장하지 말라. 아울러 그대가 신학교를 나왔으되 예수의 정신에 무지한 무신론자라면 마땅히 목사의 신분은 버리고 종교학 전공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야 옳지 않겠는가.

십자가는 버리고 영광은 누리겠다는 얄팍한 장삿속으로 인간에 대한 기초적 예절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남을 변화시키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농락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논어의 예화에서 말한 ‘일곱 가지 미움받을 죄’에서 한 가지도 걸림 없이 자유 할 수 있다면 비로소 예수께서도 그대의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霞田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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