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조선이 만들어 놓은 사대 노예 풍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글: 전집현(자유 기고가)

 

청나라 외교관이 만든 조선책략에 미국은 ‘대인배’

미국에 대한 기대감으로 1882년 5월 조미수교 이뤄

미국의 조선 사절단 환영에 고종 즉시 보빙사 파견

조선 보빙사 미국 대통령 접견에 엎드려 큰절로 인사

청, 영약 3단 만들어 압박, 조선 보빙사 속국 취급

영약 3단 어긴 박정양, 청 압력으로 10개월 만에 소환

 

▲ 박정양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을 접견하면서 큰 절을 하였다.
▲ 박정양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을 접견하면서 큰 절을 하였다.

 

<미국 ㅡ 조선 외교관계 시작 : 1888년 조선, 청나라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극복하고 미국에 공사를 파견>

1) 1882년 5월 22일 :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2) 1883년 5월 22일 : 주한 미 공사관 개설

3) 1883년 9월 18일 : 미국 보빙사,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 전달

4) 1888년 1월 17일 :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

1. 조선, 소위 "대인배"의 나라인 미국과 1882년 최우선 수교

“미국은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운 나라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으려는 대인배의 나라다.”

청나라 외교관으로 주일청국 참찬관(參贊官)이었던 황준헌(1848~1905)은 <조선책략>에서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라 평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김홍집이 이 책을 들고 귀국하자 조선 조야의 반향은 엄청났다.

재야에서는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났지만,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됐다.

이런 기대감 덕분인지 통상조약을 맺은 첫 번째 서양 국가가 바로 미국(1882년 5월, 朝美修好通商條約)이었다. 이듬해 1월에 비준되었다.

미국은 1883년 5월 22일 서울 정동에 미국공사관을 개설하고 루시 무슨 푸트를 초대 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2.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보내다

미국 공사 푸트가 고종에게 미국 체스터 아서 대통령(Chester A. Arthur, 재임 1881~1885)이 조선의 사절단 파견을 환영한다는 의향을 전하자 고종이 쾌히 동의했다.

고종은 민영익(1860~1914)을 정사(전권대신)로 한 사절단, 즉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한다.

보빙사 일행 11명은 1883년 9월 18일 뉴욕 23번가 피브스 에버뉴 호텔 1층 대연회장에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보빙사 일행은 사모관대를 갖춘 관복으로 차려입고 대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서 대통령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는 처음 보는 의전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3. 청나라의 속국 취급에 주미공사를 우여곡절 끝에 파견

(1) 청나라, 까다로운 조건하에 주미공사 파견 허용

1887년 7월 고종은 교지를 내려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박정양(1841~1905)을 임명하고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등을 주미 공관원으로 파견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 주재 청국의 총독으로 행세하던 28세의 위안스카이가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조선이 서방국가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청국의 '속방'으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등의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미국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조선 정부도 청국에 주미공사 파견을 허락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문제가 발생한 지 48일 만인 1887년 9월 25일 원세개의 상관인 이홍장은 소위 '영약3단(另約三端)' 이라는 조건을 붙여 조선의 주미공사 파견을 승인하여 주었다. 그 3가지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조선공사는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관에 가서 보고하고 청국 공사를 거쳐 미국 외무부에 가야 하며

2) 공식행사나 연회 석상에서 조선공사는 청국 공사 다음에 앉아야 하고

3) 중요 문제가 있을 때 조선공사는 청국 공사에게 미리 상의해야 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박정양 일행은 1887년 11월 제물포를 떠날 수 있었고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의사 겸 통역가인 앨런(1858~1932)과 합류하여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일행은 12월 28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이듬해인 1888년 1월 9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2) 박정양과 앨런, 청국 공사를 거치지 않고 미국과 직접 외교

박정양 공사는 앨런의 조언에 따라 청국 공사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888년 1월 13일 국무부를 방문해서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국서(신임장)를 전달할 면담 일정을 잡기로 합의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청국 공사 장음환(張蔭桓 1837~1900)이 “영약삼단을 왜 지키지 않았느냐”고 펄펄 뛰었다.

박정양 주미공사는 출발 날짜가 너무 촉박해서 우리 정부의 정식공문을 받지 못했다며 둘러댔다.

청나라는 이후에도 끈질기게 이 문제를 거론하며 박정양 공사는 물론 본국 정부까지 괴롭혔다.

1월 17일,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의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Stephen Grover Cleveland, 재임 1885~1889, 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대통령이 나타나자 공사 박정양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세 번 절하려 했으나 미국 측이 정중하게 만류했다.

(3) 청국의 간섭으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10달 만에 국내 소환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은 워싱턴 주재 중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박정양 공사가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끝까지 문제 삼고 고종에게 소환하라고 압박을 넣었다.

결국 고종은 10개월 만에 초대 공사 박정양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2대 공사로 이하영(1858~1929)을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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