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태권도는 가라테를 변형, 발전시켜 대박난 현대무술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탄생, 이전 여러이름 난립

태권도 최홍희, 태권도 태 발을 의미하고 태껸과 연결

태권도 국기로 확립 이론화 체계화 이후 세계화 박차

▲ 최배달로 유명한 최영희는 일본에 공수도(가라데)로 이름을 날렸다. 소를 잡을 정도로 힘이 셌다.
▲ 최배달로 유명한 최영희는 일본에 공수도(가라데)로 이름을 날렸다. 소를 잡을 정도로 힘이 셌다.

<태권도 : 한국 무도인이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세계적인 무술이 되었다>

1.가라테를 변형, 발전시켜 대박난 현대무술

태권도(跆拳道)는 한국 고유의 전통무술이나 민속놀이인 태껸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태권도는 일본 가라테(からて, 空手道)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이를 변형, 발전시켜 1950년대 창시된 현대무술이다.

가라테는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 당(唐)나라 ㅡ 류큐[琉球: 현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성화되었다.

류큐에서는 중국 당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당수(唐手)라고 불렸는데, 일본에서 공수(空手)로 바꾸었다. 일본발음으로 둘다 가라테다.

일제 때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무술 수련과 교육 체계 역시 일본이 가장 선진적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우리 선배 세대가 그걸 배웠고, 해방 이후 수많은 무도인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태권도라는세계적인 무술로 성장시킨 것이다.

2.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탄생

1950년대 후반 우리 무도계에는 당수도, 공수도, 권법, 화수도, 수박도, 태권도라는 명칭들이 난립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수박이나 태껸과는 무관했고, 가라테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당시 29사단 사단장 최홍희와 그의 부하 남태희가 만들었다.

그해 9월 강원도 속초에서 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때 29사단의 가라테 시범이 있었는데,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최홍희에게 "저게 바로 예로부터 전해오는 태껸이구먼. 앞으로 전 군에 보급시켜봐!"라고 말했다.

이에 최홍희와 남태희는 일본의 가라테를 지칭하던 공수도, 당수도를 버리고 옥편을 찾아가며 ‘태껸’과 비슷하게 들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이다.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무도인들은 가라테와 구분되는 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참고로 최홍희는 일제 때 도쿄 중앙대학에 다니면서 가라테부에 있었고, ‘가라테의 아버지’로 알려진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의 쇼토칸(松濤館)에서 정식으로 가라테를 배웠다.

그의 부하 남태희는 해방 이후 ‘당수도 청도관(靑濤館)’에서 무술을 수련했다. 당수도, 즉 가라테를 가르치는 도장이었다.

3. 태권도 명칭 작명 관련

첫번째 글자인 태(跆)와 관련하여 최홍희는 태권도의 '태'자는 발을 의미하며 태껸과 연관짓기 위해 "밟을 태(跆)"를 붙였다고 한다.

태권도는 높이 도약하는 자세가 많은데 도약을 하려면 바닥을 강하고 빠르게 밟아야 한다.

그리고 두번째 글자는 '권(拳)'자로 가라테를 음독한 공수도 또는 당수도에서 사용되는 손 '수(手)'자를 고려했다가 그와 비슷한 의미인 주먹 '권(拳)'이 채택하였다고 한다.

세번째 글자인 도(道)는 태권도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현대 창작 무술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데, 무예에 도(道)를 붙이는 건 일본식 조어로 전통적인 한국식 명명법이 아니다.

4.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국기(國技)로 인정

1959년, 현역 장성이었던 최홍희가 그 위세를 배경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며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이후 1961년에 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당'수'도를 절충하여 새로 만든 명칭이었다.

1965년 8월에 협회의 이름을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었다.

19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립된다. 총재는 최홍희였다.

당시 태권도는 국내에서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라 ITF는 창립 당시에는 9개국밖에 안될 정도였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기(國技)로 인정받았다.

1972년 11월 30일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이 설립되었는데, 1973년 2월 6일 '국기원'으로 개명되었다.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이 출범되고 김운용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5.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

1960년대 후반 대한태권도협회는 무술로서 태권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품새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품새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태극품새 8개, 유단자품새 9개를 만들었다. 품새는 카라테의 가타가 원류지만 차별화 노력의 결과 독창성을 갖게 되었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종우의 주도로 "태권도교본(품새편)"이 발간되었다.

6. 태권도의 세계화

1971년 1월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행정인사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끌여들여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 초대회장도 겸하면서

국제감각과 본인의 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를 성장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다.

태권도는 1980년 8월 태권도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이후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이 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올림픽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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