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에 대한 폭군의 인상은 승자들의 악의적 왜곡에서 나온 것이다.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기생 광한선을 취하는 것이 두렵다던 연산군

자색 좋은 비구니 7~8인 간음했다는 것과 모순

연산군서 나온 흥청망청의 흥청은 전문 음악인

흥청은 연산군이 아니라 사대부들의 색탐 대상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기생 광한선 등 4인을 장악원에서 천거했다는 기록의 일부분.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기생 광한선 등 4인을 장악원에서 천거했다는 기록의 일부분. 자료: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발췌.

 

연산군,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고독한 군주 (제1부)

연산군을 위한 변명

황음무도한 군주였나?

사관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모는 단골 소재는 황음(荒淫)이다. 연산군이 여색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지 살펴보자. 연산군 9년(1503) 6월 13일 음악 담당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에서 가야금 타는 기생 광한선(廣寒仙) 등 네 명의 명단을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일기》 는 재위 9년 6월 13일 왕이 술에 취해 임숭재(任崇載)에게 "내가 광한선을 취하고 싶은데 외부에서 알까 두렵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임숭재가 '세조 때도 네 명의 기생이 궁중에 출입했다'면서 "선상기(選上妓, 지방에서 올린 기생)의 출입을 외인(外人)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부추기자 결심한 연산군이 광한선을 가까이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유명해진 일화를 덧붙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미행(微行)하면서 환관 5, 6인에게 몽둥이를 쥐여 주어 정업원(淨業院)으로 달려가 늙고 추한 비구니(尼僧)를 내쫓고 연소하고 자색 있는 7, 8인만 남게 해 간음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 (《연산군일기》 9년 6월 13일)

소문이 두려워 기생 광한선을 취하는 것도 꺼리던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시끌벅적하게 때려 내쫓고 젊은 비구니를 취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중종실록》은 "처음 전전비, 장녹수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 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라며 연산군이 1,000여 명의 후궁을 거느린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니 양기(陽氣) 보양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연산군일기》 9년(1503) 2월 8일 자는 “백마 가운데 늙었으나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로 보내라”는 전교를 기록하면서 “백마 고기가 양기를 돕기 때문이다"라는 논평을 덧붙였다. 양기 보양에 늙은 말을 쓸 리 없다는 상식도 무시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있다. 흥에 겨워 재물을 마구 쓰며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데 연산군이 만든 흥청(興淸)이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 흥청은 연산군과 황음을 벌이던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의 사관은 연산군이 흥청들과 대궐이나 길가에서 집단 혼음(混淫)을 벌인 것처럼 자주 묘사했다.

그러나 흥청은 연산군의 혼음 대상이 아니라 국가 소속의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운평(運平)과 광희(廣熙)도 마찬가지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12월 “흥청이란 바르지 못하고 더러운 것을 씻으라는 뜻이고, 운평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또 “모든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은 모두 광희라고 칭하라"고 명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는 학생은 297명이고 보충 인원이 100명이며, 악공이 518명이고 10명당 1명이 보충 인원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들 국가 소속의 악생과 악공들에게 연산군이 내려 준 새 이름이 광희였다.

연산군이 재위 11년(1505) “모든 도(道)의 고을들은 모두 운평을 두라"고 말했다. 운평은 지방 관아 소속 음악인들이었다. 운평 중 음악 실력이 뛰어나 서울로 뽑혀 올라온 이들이 흥청이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 흥청악(興淸樂)은 300명, 운평악(運平樂)은 700명을 정원으로 하고 광희도 증원하라"고 명하는데, 이들 흥청악, 운평악, 광희악을 통칭 삼악(三樂)이라고 불렀다. 현재 'OO합창단' 또는 '○○ 무용단'이라는 식의 이름이다.

《경국대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선상기는 여기(女妓)가 150명, 연화대(蓮花臺, 가무극 배우)가 10명, 여의(女醫)가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뽑힌 선상기 중 뛰어난 음악인이 흥청이다. 《연산군일기》는 재위 12년(1506) 3월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했다고 써서 흥청악이 1만 명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11년 4월 장악원에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장악원은 “정원 300명 중에서 93명을 채웠고 207인을 못 채웠다"고 답했다. 93명을 겨우 채운 흥청이 11개월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 역시 사관의 악의적 창작이다.

삼악 모두가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 12년(1506) 광희악 김귀손(金龜孫)이 운평 관홍군(冠紅裙)을 강간하려고 폭력을 행사했다가 처벌받은 사건에서 남악(男樂)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악에 대해 사대부들이 분노한 진정한 이유는 자신들과의 접촉 기회를 차단한 데 있었다. 그간 여악(女樂)은 사대부들이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연산군은 재위 11년 1월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獻壽宴)을 제외하고 여악들을 조사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만들었다.

재위 12년 2월에는 광희를 사천(私賤, 사노비)으로 만들어 처로 삼을 수 없게 했다. 연산군에게 흥청은 색욕의 대상이 아니라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재위 11년 2월에는 흥청악의 공연 때 "비록 제조(提調)일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땅에 앉아야 한다"고 명했다.

이보다 앞선 재위 8년(1502) 3월 연산군은 "이제부터 궐문 밖으로 행행(行幸)할 때 여악을 쓰지 말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내려 주는 각종잔치 때도 남악만 내려 주었다. 그러자 같은 해 10월 정1품 영사 성준이 항의했다.

“지금 여악은 하사하지 않고 남악만 하사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여악을 사용했지 남악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향당(鄕黨, 지방)에서 잔치하며 마실 때도 반드시 여기를 불러 손님을 즐겁게 합니다. 지금은 비록 술을 내려도 쓸쓸할 뿐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셔도 취하지 않으면 위로하는 뜻이 아닐 것이니 조종(祖宗)의 고사를 따르소서.”(《연산군일기》 8년 10월 28일)

잔치 때 여악을 내려 달라는 이 주청에 대해 연산군은 "대개 조관들이 여기를 담연(淡然, 욕심이 없음)하게 보지 않으니 한자리에 섞이게 할 수 없었다”면서도 앞으로는 여악을 내려 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성준은 "성상께서는 사용하지 않으시면서 신들에게만 사용하게 하시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흥청은 연산군보다 사대부들의 색탐(色貪)의 대상이었다(2부에서 계속).

출처: 《조선왕조실록》5, 연산군 ㆍ중종ㆍ인종. 사대부들이 왕을 폐위시키는 군약신강의 시대, 이덕일, 2022, 158~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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