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는 조선독립위해 투쟁한 적이 없는 정신병 환자였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한국 일부 문화계 고종과 덕혜옹주 왜곡해 돈벌이

고종 늦둥이 1912년생 14세 때 강제로 일본 유학

정신병 걸린 채 대마도주와 정략결혼 고통 인생 시작

조현병 앓다 이혼, 해방 후 귀국 고통받다 77세 마감

 

▲ 서기 2016년 상영된 영화 '덕혜옹주' 홍보지.
▲ 서기 2016년 상영된 영화 '덕혜옹주' 홍보지.

 

<독립운동을 한 덕혜옹주? 10대 후반부터 정신병으로 본인 몸도 제대로 건사 못할 수준>

일부 문화계가 돈벌이를 위해 부끄러운 우리 역사까지 抗日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고 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개혁 군주 <고종>,

조선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게 독립의식을 키워 준 <덕혜옹주>.

이것이 영화로 제작된 덕혜옹주와 고종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과포장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동영의 영화 포스터처럼 그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도 아니다. 1912년에 태어났으니 이미 대한제국이 망한 지 2년이나 지났다.

1. 고종의 고명딸로 귀여움 독차지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는 고종의 고명딸이다. 고종의 자녀들 가운데 성인이 된 사람은 순종,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 네 사람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과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덕혜(德惠)는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이다.

고종이 59세 때 낳은 늦둥이이자 고명딸이어서, 덕혜옹주는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은 1916년 덕수궁 준명당(浚眀堂)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다.

1919년 1월 21일 아버지 고종이 승하했다. 덕혜의 나이 이제 겨우 8살.

유치원 졸업 후 1921년 덕혜는 서울에서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히노데(日出) 소학교에 진학했는데,

그 시절 일본 옷을 입고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동요나 친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다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2. 14세 때 일본으로 강제 유학 가다(볼모 신세)

1925년 14살인 어린 덕혜옹주는 어머니와 떨어져 낯선 곳,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 특권층인 황족과 황족의 영애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女子學習院)에 편입학되었다.

그녀는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또한 자신도 언제 독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 고종 독살설)

그러다 그녀 나이 17살 때인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끝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몽유병과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1930년 5월 진단)

등교 거부를 하기도 해 여자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고, 1931년에야 학업을 마쳤다.

▲ 10대의 덕혜옹주.
▲ 10대의 덕혜옹주.

 

3. 정신병 걸린 상태에서 대마도주 후예와 정략 결혼하다

덕혜옹주는 19세가 되던 1931년 5월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소 백작은 조선에 신속(臣屬)했던 쓰시마 도주(島主)의 후예였다.

소 다케유키는 사시(斜視)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도쿄 제대 영문과를 나온 그는 시인이자 화가였고, 후일 대학교수로 영문학을 가르쳤다. 동료 교수나 제자, 지인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정신병 증세가 다소 나아져 말이나마 조금 조리 있게 하게 되자 결혼식을 치렀다.

4. 정신병원에 장기입원하다 합의이혼

결혼 후 5개월쯤 지난 1931년 10월, 소 백작 부부가 쓰시마섬을 방문했다.

이때 덕혜옹주는 끊임없이 소리를 내어 웃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병적인 거동을 보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병이 재발한 것이다.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소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사에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했고, 부부 사이도 점점 파탄이 난다.

덕혜옹주는 결국 1946년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뒤 둘 간의 별거 상태가 10년 가까이 지속된다.

결국 덕혜옹주는 1955년 이혼했다. 이혼은 소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자였기 때문에 오빠 부부인 영친왕, 이방자가 후견인으로서 대신 협의해주었다.

딸 마사에(正惠)는 그해 학교 선생과 결혼했지만, 이듬해 가출, 일본의 남알프스 산맥에서 실종됐다. 그녀는 신경쇠약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 말년의 덕혜 옹주.
▲ 말년의 덕혜 옹주.

 

5. 귀국 후 정신 혼미하게 지내다 사망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지 16년 후인 51세 때 1962년 1월 2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배려로 귀국했다.

조국을 떠난 지 37년 만의 일이다.

14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그것도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왔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유모 변복동은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창덕궁의 상궁들, 운현궁의 친척들이 그를 맞이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서울대 병원에서 7년간 요양을 했는데 죽을 때까지 간간히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뿐 치매와 정신착란 속에 지냈다.

그녀는 순종비 윤대비가 사망한 후인 1968년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갔다.

말년에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손뼉을 치며 “마사에!” “마사에!”라고 외치며 슬픈 표정을 짓곤 했다고 한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고단했던 이 세상을 떠났다.

2016년 허진호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였다. 대마도에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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