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미 군정이 뒤틀어 놓은 반서민 비극의 역사다.

 

글: 지승룡(민들레영토 대표)

 

미군정청 1946.7. ‘미래 한국 통치구조’ 여론조사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 13%

가장 유능하고 양심적인 지도자는 여운형이 압도

미군정, 전범국 일본에 가장 민중 친화적인 개혁추진

피해자 한국에는 민중 억압적인 극우체제로 몰아가

미군이 뒤틀어 놓은 비정상 체제로

가장 진보적 대구가 오늘날 가장 수구적으로 추락

 

▲ 서기 1945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여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였다. 사진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을 미 군정청으로 초청하여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미군정청이 한국을 이끌 지도자를 여러가지 항목을 들어 누구로 보느냐는 여론조사 결과는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었다. 몽양 여운형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지도자로 꼽혔다(편집자 주).
▲ 서기 1945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여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였다. 사진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을 미 군정청으로 초청하여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미군정청이 실시한 한국을 이끌 지도자를 여러가지 항목을 들어 누구로 보느냐는 여론조사 결과는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었다. 몽양 여운형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지도자로 꼽혔다(편집자 주).

 

<46년 여론조사는 미군청을 당혹하게 했다>

미군 ‘점령군’ 논란을 보며 생각난 자료다. 미 군정청 여론조사국이 1946년 7월에 실시한 ‘미래 한국 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다.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가 13%를 차지했다.

미군정은 이 민심을 무력화하려고 광분했다. 대구 10월 인민봉기, 단독(반공)정부 수립, 제주4.3항쟁, 여순항쟁, 코리아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자본주의, 나)사회주의, 다)공산주의

남조선인민들의 답은 이러했다.(남조선인민이란 말은 미 군정청이 사용한 말이었다) 자본주의 (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74명, 7%), 모른다(653명, 8%)였다.

또한 남조선 인민들이 리더로 누구를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하며. ①국제정세에 정통하고 ②조선 사정에 통달하고, ③가장 양심적이고 과학적이고 조직적이고 ④가장 정치적으로 포옹할 아량을 가진 정치인을 선택하라는 것에 남조선 인민들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1,957매의 설문지를 배포하고 626매를 회수하여 집계 (설문지 회수율 32%)였다.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 홍남표 5%. 외 23명;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 허용 때문) 당시 남조선인민들 대다수는 상당히 전략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민들은 남조선 토지는 국유화해서 친일파가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이런 새 나라의 과제를 미 군정청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해임시정부가 주축이 된 새 정부가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근 현대사 조선민중들의 집단지성은 이렇게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연스런 여론으로 남조선이 가면 미국은 최대 인구를 지닌 아시아 시장에 진출 할 수 없고 심지어 일본까지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좌파나 중도가 아닌 확실한 우파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좌파지향적인 민중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친일 관료들과 고문과 수탈기술을 지닌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것이었다.

주목할 것은 해방 후 맥아더가 이끈 두 개의 미군정 간의 차이이다. 즉 남한의 미군정과 일본 미군정의 차이다. 두 나라에서 친미적인 우익정권을 세운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내용적으로 기이한 역설을 우린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 전범국가인 일본에선 민중친화적인 '개혁'을 주도했다면, 정작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에는 민중억압적인 극우체제로 몰고 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군정은 일본에서는 일본이 다시 파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농지개혁, 재벌 해체, 노동조합 설치 등을 실시했다. 맥아더가 한국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 중에 하나가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일본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은 노동조합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 결과, 3만5000개의 노동조합이 생겨나 650만 명이 가입했고, 첫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해 첫 내각으로 사회당-민주당 연정이 출범했다.

그러나 남 코리아 에서는 보통 선거권을 주고 자유 민주주의의 기반을 제공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조선공산당과 같은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건준 같은 중도좌파 온건진보 세력도 공산주의 등으로 몰아 탄압하고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을 만들었다.

한 정치학자는 "일본민주주의는 미군정의 산물"이라고 썼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일본민주주의를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일본민주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준 선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미국은 전범국인 일본에는 민주주의를, 전범국가의 피해자인 우리에게는 극우독재를 선물했다.

그 결과 미 군정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극우정치에 의해 고통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 여파로 고통을 받고 있다. 나아가 미군정의 종식과 함께 떠났던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 날아와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 받아 우리 군을 지배하고 우리 땅에 항구적으로 주둔하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지금은 대구가 정치적으로 보수를 대변하는 지역이 되었지만 실은 대구에는 이여성, 이쾌대 형제처럼 진보적인 인사들이 타 지역보다 많았다.

이여성은 18세 때 김원봉과 김약수와 만주로 망명해 무장 독립운동을 했고 3.1운동이후 귀국해서 대구에서 ‘혜성단’ 이란 무장단체를 만들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된다. 이후 이여성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사회주의사상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조선 동아일보기자로 활동한 이여성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추진하면서 약소민족 운동에 대한 글을 올리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그는 강제 해직 된다.

그는 해방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하며 여운형의 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남조선 시민당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이승만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운형의 실제적 전략을 감당하는 역할을 맡는다.

여운형 암살이후 이여성도 역시 구속되었고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의 역사학교수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여성은 그림과 인문학에 대하여 깊은 조예가 있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말하는 이쾌대는 이여성의 미술을 보고 화가가 되었다.

이여성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후 미술에 깊이 심취하며 조선의 미학을 이루는 노력을 다하는데 그 때 신동아에 남긴 그의 말이 인상적이다.

“조선예술가는 풀죽은 거동과 졸린 눈초리를 갖고 담배와 술 여인과 불규칙과 무절제로 보내는데 이런 것들과 싸울 굳은 결심을 하자. 조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예술을 지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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