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왜란은 서기 1894년 7월 23일 시작하여 서기 1945년 8월 15일 끝났다.

 

동학혁명은 1차 봉기와 2차 봉기로 구분돼

1차 봉기로 청군과 일본군 조선에 들어와

일본군 철수시키려 동학군과 정부 전주 화약

일본군 거꾸로 7.23 경복궁 습격 왕 포로 잡아

일본군 포로가 된 고종, 일본군 친일내각 만들어

정부군과 일본군 합세하여 동학 혁명군 학살

 

▲ 일본군이 서기1894.07.21(양력) 경복궁을 기습접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아 친일파 내각을 세웠다. 이때 대원군을 내세워 진행하였다. 위 그림은 경복궁 점령과 흥선대원군을 입궁시키는 일본군의 모습.
▲ 일본군이 서기1894.07.21(양력) 경복궁을 기습접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아 친일파 내각을 세웠다.  https://www.yamada-shoten.com/onlinestore/detail.php?item_id=50557

북한은 지난 7월 23일 조선중앙통신 발로 ‘조선왕궁습격 사건’이라는 개인 필명의 글을 내 보냈다. 글은 서기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습격하였다고 전하며 전모를 상세하게 고발하였다. 6월 21일은 음력으로 표기한 것이고 양력은 7월 23일이다.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서기 1894년에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갑오 농민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은 거류민 보호, 공사관, 영사관 호위를 구실로 군대를 보냈다. 일본군의 출병으로 국권이 위태로워지고 예상 밖의 사태로 번지는 것을 염려한 농민군과 정부는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농민군은 해산하였다.

정부는 일본군이 주둔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철수하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소위 내정개혁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친일내각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고 내정과 외교 문제는 조선정 부의 권한임을 분명히 하였다.

일본군은 청과 전쟁을 하려고 출병한 것이라 먼저 조선 정부를 제압하여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을 제1과제로 삼았다.

이에 따라, “6월 21일(양력 7월 23일)새 벽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개 연대의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 왕궁의 성벽을 넘어 들어와 왕궁호위병들을 살해한 다음 성문을 열어젖히고 쓸어 들었다. 이때 왕궁을 수비하고 있던 군인들이 침략자들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의 침입을 끝까지 막아내지 못하였다.

왕궁을 점령한 일본 침략자들은 국왕과 왕비를 연금하였다. 조선 봉건 정부 대신들의 왕궁 출입까지도 제멋대로 금지시킨 일본 침략자들은 전보국을 점령하고 통신을 완전한 마비 상태에 빠뜨렸다.”

일본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선정부의) 무기고를 점령하고 대포 30문, 기관포 8문, 보병총 2000여 정을 비롯한 각종 무기와 군수기재를 탈취하였으며 수백 년간 귀중히 보존해온 왕궁창고의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들을 파괴략탈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어 한성 시내의 군대 병영들을 점령하고 군인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그리고 시내 여러 곳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살해하고 집들에 불을 지르는 등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이 사건을 조선왕궁습격사건으로 부른다. 남한에서는 경복궁 점령 사건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이후 소위 갑오개혁으로 알려진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강제로 들어선다. 개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일본군이 왕을 포로로 잡아 협박하여 만든 조선을 강탈하기 위한 순서의 하나였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의 연장선에 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일본군의 북상을 미리 알고 도주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갑오년에는 일본군이 이미 도성에 진주해 있었고 본격적인 침략 신호탄으로 고종과 왕비를 경복궁을 기습하여 포로로 잡았다. 임진왜란 때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룬 셈이다.

이후 서기 1945.08.15. 미국에 패망하기까지 기나긴 일제 침략이 이어진다. 임진왜란이 7년이었다면. 갑오 왜란은 서기 1894년 7월 23일 시작하여 서기 1945.08.15.까지 장장 51년이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군의 경복궁점령은 갑오 왜란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더 부합한다.

한편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하여 왕을 포로로 잡자 동학혁명군은 2차 봉기를 하였다. 나라를 구하고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한 전쟁선포였다. 척왜라는 전쟁 목적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성격도 있었지만 서기 1894년 갑오년의 의병은 동학이라는 단일 조직이 중심이 된 체계화된 부대였다. 대일전쟁을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동학 혁명군은 조선을 대표하는 군대였다.

다만 조선 정부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자 관군이 거꾸로 일본군의 향도가 되어 동학 혁명군 진압에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외국군대와 합세하여 자국민을 학살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이성계 조선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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