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왜민족반역자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대한민국은 정상국가 아니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외교권 박탈 을사늑약은 덕수궁 중명전서 체결

2009년 중명전 복원돼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 중

총독관저는 남산 입구 명동역 인근에 자리 잡아

1910년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 장소는 총독관저

박정희 군산반란으로 철거된 뒤 표지석 세워 교훈

서울시 국치의 거리로 조성해 총독관저 터도 포함

▲ 남산 입구에 세워진 조선 총독 관저. 출처: 서울특별시 서울아카이브 근현대서울사진
▲ 남산 입구에 세워진 조선 총독 관저. 출처: 서울특별시 서울아카이브 근현대서울사진

 

< 을사늑약 체결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그럼 경술국치조약 체결장소는?>

1. 을사늑약(을사조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이곳에서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조약에 사인했다.

대한제국의 일본 제국에 대한 외교권이 양도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중명전은 2009년 대한제국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을사늑약 전시관을 마련하여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은 통감 숙소에서 몰래 조인

그렇다면, 한일강제병합이 체결된 장소는 어디일까? 한국통감 테라우치의 관저(2층)다.

1910년 8월 22일 ‘통감관저’에서 강제병합조약에 이완용과 데라우치와 조인했다고 한다.

조약의 조인 사실은 1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순종황제 조칙의 형태로 반포된다.

이 ‘통감관저’가 있었던 장소는 남산 입구(명동역 인근)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향하는 언덕에 있는 공터다.

3. 해방 이전 통감관저는 총독관저로, 기념관으로 사용

1906년 1월 31일 자로 일본공사관이 폐쇄되고 통감부가 설치됨에 따라 이곳은 ‘통감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1907년 새로운 청사를 건립하자 ‘통감관저’로 전환된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이곳 역시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데라우치 초대 총독부터 7대 미나미 총독(식민지배 기간 중 총독은 총 9명)까지 이곳에서 거처하며,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1939년 총독관저가 이전한 후, 한일강제병합조약을 기념하고 역대 통감과 총독의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사용되었다.

4. 해방 이후 국치의 장소가 박물관으로 사용되다 박정희 때 무단철거

광복 이후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 1953년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1954년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기, 건물 주변에 중앙정보부 청사를 세우게 되면서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에 대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철거해버렸다.

5. 2005년 통감부 터를 발견하여 일제강점의 치욕을 기억하다

2005년 7월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이순우 소장에 의해 이 장소가 알려지게 된다.

이후 2010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여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석을 세운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이를 알리는 표석과 더불어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다.

‘거꾸로 세운 동상’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일부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이다.

‘하야시 곤스케’는 주한 공사로 부임하여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협약 체결 등에 관여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1936년,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인 2006년 동상 일부가 깨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동상의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우게 된다.

서울시는 국권 상실의 현장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뜻에서 ‘국치의 길’을 조성했다. ‘통감관저 터’ 또한 ‘국치의 길’ 코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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