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미제, 소제가 기획하고 김일성, 이승만이 호응하였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625 전쟁은 남북 함께 민간인 학살로 점철돼   

 중공군 인해전술은 미군에  공포의 대상 각인

 제공권 장악한  미군,  폭격으로 북한 초토화

군대 폐습  '원산 폭격', 미군 원산 폭격에 기원

625  전쟁당시 흥남에서의 민간인 탈출 상황
625 전쟁당시 흥남에서의 민간인 탈출 상황

<6.25 전쟁, 민간인이 많이 죽고 원산폭격에 흥남철수까지>

1. 민간인 사망자가 휠씬 많았다.

남한군인중 사망자가 15만명인데 민간인은 77만명이나 희생되었다. 전쟁중 민간인이 민간인을 대량 죽였기 때문이다. 

몇십년간 이웃이던 사람들이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옆집 사람들을 죽이다가 전세가 바뀌자 보복으로 죽임을 당했다.

2.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사람 수만 내세워 상대를 공격하는 원시적인 군대였나? 실제 중공군은 날카롭고 정밀한 작전능력을 선보였다. 어둠을 타고 기습을 감행했고 심리전, 매복과 우회·포위에도 매우 능했다. 

‘인해전술’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에 대한 미군들의 두려움을 반영한 용어라고 한다.

3. 제공권은 미군이 장악

6.25때 북한군 침략에 3일만에 서울 포기하고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근데 이건 육지 상황이다.  전쟁직후 미군은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평양 지역 등을 항공폭격했다. 제공권은 미군이 내내 장악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군, 북한주민은 하늘의 전투기와 폭탄을 젤 무서워한다고 한다.

4. 원산폭격은 요즘은 금지

6.25 당시 김일성은 미공군 B-29 폭격기의 융단폭격을 젤 두려워했다. 융단폭격으로  북한 도시 73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엔 건물 2채만 남았다.  특히 전략요충지인 원산은 2.5년간 폭격으로 허허벌판이 되었다.

이로써 혹독한 군대 기합 한 종류인 "원산폭격" 탄생했다. 양손을 뒤로 돌리고 땅에 머리 박기이다. 휴전후 북한은 유사시 대비 곳곳에 대규모 지하시설을 구축했다. 

현재 미군 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상공출격은 6·25 악몽을 활용한 대북 무력시위라 볼 수 있다.

5. 흥남철수(1950.12.15~23)

상당한 위험을 내포한 인도주의적 결정이었다. 함께 철수한 민간인들이 미군편이 아닐수도 있다는 점때문이다. 몰려든 주민은 분명히 북한주민이고, 미군측에선 적의 편에 있는 주민들이었다.북한군이 숨어들수도 있고 게릴라가 있을수도 있었다. 문재인 전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 때 배를 타고 탈출한 피란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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