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여왕이 탄생한 것은 대를 이을 남자 없었기 때문이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당시 여권이 강했다,
남녀평등 사상이 있었다,
모계전통사회였다"
이는 사실과 다른 잘못된 설
<신라에서만 여왕이 탄생한 이유>
1.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덕만(德曼)이 여왕에 즉위하다
"당시 여권이 강했다, 남녀평등 사상이 있었다, 모계전통사회였다"는 다 엉터리다.
법흥왕(法興王, 23대) 무렵부터 성골만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법흥왕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진평왕(26대, 재위 579~632)은 딸 셋에 아들 하나가 있긴 했으나 어릴때 아들이 죽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진평왕 사망 당시 남동생들(백반伯飯, 국반國飯)은 저세상 사람이었다. 즉 남자 성골
(聖骨)의 씨가 마른 것이다.
당시 성골로 남은건 진평왕 딸(27대 선덕여왕, 재위 632~647)과 조카(28대 진덕여왕, 647~654)뿐이었다.
2. 진평왕의 딸딸이 이야기
1) 맏딸 덕만(德曼) : 신라 최초의 여왕인 제27대 선덕여왕으로 즉위
2) 둘때딸 천명부인(天明夫人) : 진지왕(25대)의 아들인 이찬 김용춘(金龍春)과 결혼해 무열왕(武烈王, 29대, 재위 654~661)을 낳았다.
3) 세째딸 선화공주(善花公主): 미모의 공주였다. 백제의 무왕(武王, 30대, 재위 600~641)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서라벌에 잠입하여 서동요(薯童謠)를 퍼뜨리는 등 꾀를 써서 궁궐에서 쫒겨난 선화공주와 결혼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서동요)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薯童房乙) 밤에 뭘 안고 가다(夜矣 夗[卯]乙抱遣去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