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 항쟁은 동학혁명에서 부터 이어지는 자주독립 및 백성이 주인되는 투쟁이었다.

김 상 윤(광민회 고문)

 

오늘 당신을 보냈습니다.

동년이 형님, 안녕히 가십시오.

‘광주 내란 수괴’ 사형수 정동년을 보내며.

 

당신은 결국 항상 오월을 벗어나지 못하시는군요.

동년이 형님, 오월의 품에서 고이 잠드십시오.

“어이, 상윤이. 이번에 정동년도 같이 복학시키소.”

“정동년이 누군데요?”

“하기사, 자네들이 정동년을 알 턱이 없지.”

▲ 조사를 낭독하는 황일봉 518 광주항쟁 부상자회 회장
▲ 조사를 낭독하는 황일봉 518 광주항쟁 부상자회 회장

1980년 3월이었습니다. 박석무 형님이 나를 불러 1965년 한일회담반대 시위 때 제적당한 정동년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1964년 6·3 시위 때 시위를 함께 주도하던 정동년은 다음 해에 총학생회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홍길 박석무 등이 적극 지원한 성과였습니다. 1965년 3월 31일, 전남대에서 전국 최초로 시위가 다시 일어났고, 이 시위로 말미암아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학생회장 정동년은 구속되었다가 2개월 후에 석방되었는데,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또 시위를 주도해 학생회장 정동년은 그때 제적당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민준식 전남대 총장을 면담하여 정동년의 복학을 허락받았습니다. 정동년은 1980년 그 소란의 와중에 전남대 '복적생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동년 선배와 우리 사이의 생각의 차이는 매우 컸습니다. 15년 세월의 간극이었습니다. 이 고집불통의 선배는 6·3한일회담반대 시위 때의 동지들인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교감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윤한봉 선배와 나는 학생운동이 정치권과 단호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윤한봉과 저를 비롯하여 박관현 학생회장을 정읍에서 열리는 동학기념식에 대동하고 가려는 것도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우리가 김대중을 직접 만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정동년 선배는 동교동을 방문하였으나, 직접 김대중을 만나지는 못하고 방명록에 이름만 적어놓고 돌아온 모양입니다. 이것이 결국 큰 사단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 고 정동년 선생의 영정을 앞세우고 장례 행렬이 나가고 있다.
▲ 고 정동년 선생의 영정을 앞세우고 장례 행렬이 나가고 있다.

상무대 영창 한 방에 있던 병사 하나가 갑자기 큰 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영창 안 화장실에서였습니다. 놀라서 화장실로 뛰어가니 동년 형이 온몸에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동교동 방명록에서 정동년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합수단은 혹독한 고문을 가해, 정동년이 김대중에게 500만 원을 시위 자금으로 수령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모양이었습니다.

동년 형과 나는 5월 17일 자정 무렵에 예비검속되었기 때문에, 기껏해야 포고령 위반으로 3년형에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문제가 크게 확대될 것 같이 느꼈는지 동년 형은 갈라진 숟가락으로 이마와 배를 갈라 자살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동년 형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 조처되었습니다.

6월 말에 전남대 학생회 간부들 몇 명이 자수하여 영창으로 들어왔습니다. 총무부장 양강섭이 학생회장 선거 때 김상윤 선배로부터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내란 수괴를 누구로 할 것인지 고민하던 합수부는 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해 내가 박관현에게 준 선거자금을 김대중에게 받은 것으로 둔갑시켰습니다.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준 내란 자금 500만 원은 윤한봉을 통해 조선대 김운기에게 일부 전달되고, 김상윤을 통해 전남대 총학생회로 전달되었다는 각본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헌화하는 부인 이명자 여사
▲헌화하는 부인 이명자 여사

정동년은 다시 소환되었고, 합수단은 자신들이 만든 각본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이미 김상윤 김운기를 통해 각본을 완성해 놓은 다음이었습니다.

‘결국 내가 수괴가 되는 것 같은데, 어찌 순순히 각본에 서명할 수 있겠느냐?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문을 가하든지 두들겨 패든지 알아서 해라.“

정동년 선배는 여러 번 까무러칠 정도로 린치를 당한 후에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김상윤 김운기의 조서 작성이 끝나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불가항력이었겠지요.

김운기는 ‘왜 내가 전남대 윤한봉에게 돈을 받았다고 하느냐, 내가 직접 김대중에게 돈을 받아왔다고 해달라’고 했으나, ‘그건 각본에 없어, 이 자식아’ 그러면서 온몸이 까맣게 되도록 두들겨 맞았습니다. 너무 많이 맞아 김운기 몸을 보면 그 상처 때문에 내가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 헌화하는 큰 아들 정재헌씨
▲ 헌화하는 큰 아들 정재헌씨

“정동년 사형! 김상윤 20년!”

모든 각본이 나를 고문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사형당하리라 생각했고, 조사하던 사람들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일을 도모해보지도 못하고 개죽음당한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도 했지만, 엄청난 죽음의 공포를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상윤 20년’이라는 선고를 받자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온몸에 환희가 차오르는 듯했습니다. ‘정동년 사형!’은 내 머리 속에 아예 없었습니다.

재판을 마치고 우리 일행이 트럭을 타고 교도소로 돌아가는데, 동년 형 형수가 먼발치에서 혼자 망연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형수, 우리 죽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속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 조사를 읽는 박석무 이사장
▲ 조사를 읽는 박석무 이사장

교도소에 도착해 각기 헤어지는데, 동년 형이 마냥 콧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넋이 나간 사람 같았으나 겉모습은 참으로 태연했습니다. 나는 형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형님께 너무 미안했고, 살았다고 기뻐한 나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래 너는 죽지 않고 살아서 참 좋겠다.’ 내 독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없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동년이 형,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나는 그런 일을 겪은 후 절대 큰일 할 사람이 못 된다고 판단해, 지금까지 항상 뒷바라지만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항소이유서를 아무도 쓰지 않았습니다. 항소이유서 따위를 써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상윤이, 그래도 역사적 기록은 남겨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제대로 된 항소이유서를 써서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세.”

동년 형의 권유에 못 이겨 나는 무려 13장이나 되는 항소이유서를 썼고, 그것을 밖으로 빼내 아내에게 전달했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학봉 지선 스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학봉 지선 스님.

아내는 정형달 신부와 상의했고, 황석영 형을 통해 일본으로 몰래 빼돌리자고 의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광주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사자가 직접 쓴 항소이유서가 외신에 알려지면 ‘광주사태’의 진실이 세계만방에 알려지리라는 것이었지요.

순간적인 판단으로 나는 반대했습니다. 온몸이 지쳐 있어 또다시 저들의 혹독한 고문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보다는 민청학련 사건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고행 1974년’이라는 글을 세 번에 걸쳐 발표했습니다.

그 글에서 김지하는 인혁당 관련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지, 그 고문의 결과로 모든 것이 거짓으로 조작되어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했습니다.

김지하는 다시 구속되었고 인혁당 관련자들은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된 날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지요. 박정희 정권이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한 것이지요.

‘나 때문에 사형 언도를 받은 정동년이 내 항소이유서 때문에 사형이 집행된다면, 나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습니다.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석영이 형 보고 일본에 선물 보내지 말라고 하세요.”

내 항소이유서는 외신을 탈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정형달 신부를 통해 여러 곳에 전달되어 석방 운동하시는 분들에게 ‘이건 조작이다’는 확신을 주었다고 합니다.

▲ 장례식에 참석한 필자.
▲ 장례식에 참석한 필자.

대법원 형이 확정되자 우리는 같은 버스를 타고 대전까지 갔습니다. 홍남순 변호사님과 나는 홍성교도소로 옮기게 되었는데, 버스 안에서 동년 형님의 큰 웃음이 너무 밝고 환해 보여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밝고 환한 웃음, 언제나 낙천적인 그 웃음이 지금 바로 우리 곁에 그대로 있군요.

고집쟁이 동년 형님은 빼어난 전략가도 아니고 명민한 기획자도 아니지만, 자기가 갈 길이라면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는 분이었습니다.

60년대 한일회담반대 투쟁 때부터 광주항쟁을 거쳐, 인천 노동투쟁 현장이나 이철규 열사 사인 규명 투쟁 등 당신이 필요한 곳에서는 항상 당당히 서 계셨지요.

어느 해 경상도 어느 교도소에서 석방되는 형님을 모시러 갔을 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큰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셨지요. 이제 형님의 그 큰 웃음은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정동년의 부활을 끊임없이 노래하리라 믿습니다.

"정동년, 나의 영원한 형님!

이제 모든 시름 뒤로하시고 마음 편히 잘 가시요'"

2022년 5월 31일

죄 많은 아우 상윤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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