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도 반쪽이지만 빼앗긴 역사는 전혀 수복되지 않고 있다.

 

일제의 조선침략은 모국에 대한 강간, 살인, 약탈

일본 열도 역사는 모국, 조선인의 이주 개척의 역사

조선사편찬은 식민통치 정당화 및 민족 말살이 목적

총독부 부역자 이병도, 신석호가 해방 후 역사학 장악

식민사관이 장악한 역사학, 반국익 일본 이익으로 귀결

▲ 왼쪽이 신석호, 오른쪽이 이병도. 신석호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으로, 이병도는 수사관보로 부역한 친일 식민사학자였다. 이들의 후예가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
▲ 왼쪽이 신석호, 오른쪽이 이병도. 신석호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으로, 이병도는 수사관보로 부역한 친일 식민사학자였다. 이들의 후예가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 제국주의를 모방하여 해외식민지 침탈에 나섰다. 첫 희생물이 일본 열도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이었다. 역사학, 고고학, 유전학, 골상학 등 모든 지표가 한 땅(한반도) 사람과 일본 사람이 80% 이상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섬나라 일본이 한땅 사람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현대 미국이 영국 등 유럽인이 이주 정복하여 만든 것과 같다.

한 땅과 열도 사람들이 80% 이상 같다는 것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모국에 대한 강간, 살인, 약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 침략은 작은 집이 작은 집이기를 거부하고 큰집을 파괴하고 자신이 종가 노릇을 하겠다는 이른바 환부역조의 패륜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이 모국, 영국과 사이좋게 지내며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작은 집이 큰집이 되겠다는 공작은 우리 역사를 일본제국의 지방사로 날조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서기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이후 국내외에서 대일 독립투쟁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나라가 망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지식인층에서 반성의 기운이 폭발하였고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사실상 우리 역사의 출발점인 단군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겼다는 뼈저린 반성이었다.

따라서 독립투쟁의 중심은 단군이었다. 백암 박은식, 무원 김교헌,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담원 정인보 등 독립투사들이 하나같이 역사학자인 이유도 역사가 독립투쟁의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단군 중심의 역사에서 대일 독립투쟁의 근거를 찾았다. 무장 투쟁과 동시에 조선 백성에게 바른 역사를 가르쳐 정체성과 자긍심을 불어넣어 독립 정신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역사투쟁을 독립투사들이 낸 역사서를 수거하여 없애면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 정책이 오히려 조선인에게 독립 투지만 높여준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조선사를 만들어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일제는 국내에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백암 박은식의 <한국통사>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반도사 편찬 편성 요지에서 이 책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일제는 이에 따라 서기 1916년 조선총독부가 직접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여 막대한 예산과 인력 및 독립투사들의 역사자료와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질과 양면에서 우수한 사료채집으로 조선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반도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역사는 반도 안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 조선반도사 편찬 기본원칙이었다. 또 시간상으로는 단군조선의 역사는 신화이니 편년체로 하는 조선사에 넣을 수 없다고 하였다. 대신에 정체가 불명하거나 망하는 역사만 기록된 중국인 기자나 위만 조선을 우리 역사 시작으로 잡았다.

더구나 중국 한나라 왕, 유철이 위만 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한사군을 강조하여 우리 역사가 식민지로 시작되었다고 주입하였다. 한사군의 중심군인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설치되었는데 식민지 모국, 한나라가 망해도 식민지 낙랑군은 끝까지 살아남아 버티다가 서기 313년 고구려에 멸망하기까지 4백 년이 넘게 식민지배하였다고 가르쳤다.

또 낙랑군이 고구려에 멸망했다고 하나 그 잔여 세력이 남하하여 백제를 나라답게 하는데 중추 세력으로 활약하였고 나머지도 삼한이 발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고 하였다.

또 경남 가야 지방에는 일본 고대 야마토 왜가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을 설치하여 2백 년이 넘게 식민지배를 하였다고 가르쳤다. 허무맹랑한 기록으로 가득 찬 <일본서기>를 토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일제는 식민지배로 시작한 반도 조선사를 만드는데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조선반도사 편성 요지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한 의도를 드러냈다.

“물질적 경영에 힘을 쏟음과 동시에 교화, 풍기, 자선, 의료 등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민중들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함으로써 이들을 충량한 제국신민帝國臣民에 부끄럽지 않은 지위로 이끌 것을 기대한다.”

충성스럽고 선량한 일본제국의 신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조선반도사를 만드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조선반도사를 편찬하는 근본 목적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인종이기 때문에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겠다는데 있었다. 이것이 식민사관의 하나인 소위 일선 동조론이다.

일제는 서기 1922년 12월에 조선사를 보다 정교하게 날조하기 위하여 기존의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도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순수한 역사편찬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 복무하고 정당화하는 이론, 이념으로 역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때도 일제는 일본인만 참여하면 정당성과 객관성이 없다는 반격을 받을까 봐 조선인도 대거 참여시켰다.

서기 1925년 6월 6일에는 기존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폐지하고 더욱 내실 있게 개조한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켰다. 조선사편수회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이 고문으로 참여하였고, 현재 국사책의 기초를 마련한 신석호는 1930년 7월 편수계 촉탁으로 등록되었다. 또한, 신석호보다 현재 국사책 기초를 다지는데 결정 역할을 한 이병도는 서기 1927년 이전부터 수사관보로 활동하였다.

문제는 신석호, 이병도의 행각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역사학을 지배하는 세력이 신석호, 이병도의 후예들이라 일제가 만들어낸 반도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력이 전국 대학교, 박물관, 연구소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 모든 국학 및 역사 관련 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그 결과 역사 관련 대규모 국책사업도 이들이 다 장악하여 반국익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1조 2천억 원이라는 국민 세금을 투입하여 가야사를 복원하라고 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로 복원하였다.

조선사 편수 사업은 일단 서기1938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부속사업이 산적해 있었다.

가야사 복원 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가 서기1916년 조선반도사 편찬 사업을 시작으로 22년 넘게 공들여 만들다 서기 1945. 08. 15. 일제패망으로 중단된 식민지 조선사를 일제가 아닌 우리가 완성하는 짓을 되풀이 하고 있다.

광복도 친일파가 주도하여 대한민국을 세워 반쪽짜리 신세가 되었지만, 역사는 일제에게 강탈당한 이후 전혀 되찾아 오지 못하고 있다.

정신은 역사 지배를 받는다. 무엇을 하든지 배운 역사가 기준이고 일의 기초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 역사가 일제가 만들어 준 것이고 청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은 여전히 조선총독부 식민통치 지배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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