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 야마토 왜를 건설한 것은 대륙에서 내려온 부여 백제세력이었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구태는 북부여 왕족 출신으로, 후한 말기인 2세기 전반에

중국 요동지역에서 활동하며 요서 지역의 대방 땅에

서부여(122년 건국)를 건국한 창업자로 등장

선비족의 일파인 공손 씨의 지도자인 공손도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혼인동맹을 맺기도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를 세운 왕조 대륙 부여세력

대륙 부여 전사들은 서부여 구태계이며,

한반도로 건너온 백가제해 세력

 

▲ 백제는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출발지는 요동지역 있었다.
▲ 백제는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출발지는 요동지역 있었다.

 

백제 건국신화 4-3-2

정재수는 <삼국사기>나 중국 문헌 등의 기존 사료 이외에 <백제서기>나 <백제왕기> 그리고 <고구려사략> 등 '남당필사본'까지 사료로 활용하면서, 백제 건국 시조에 대해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정재수의 견해를 간략히 요약해 보겠다.

백제 건국과정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시조 온조왕 기록에 잘 정리되어 있다. 시조를 온조 비류 구태 등 3명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통상적으로 온조왕 기록은 '고구려계통설'이고, 비류왕 기록은 '부여계통설'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고, 비류왕은 '일설'이라 하여 이설로 취급한다.

또한 중국 사료를 인용하여 시조 구태설을 설명하고,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백제는 온조계 비류계 구태계가 왕통을 이었거나 혹은 중간에 교체되는 과정을 밟는다.

<백제서기>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처음 미추홀에 도착하여 얼마간 같이 살았고, 이후 온조가 미추홀의 비류로부터 독립한다.

<삼국사기>에 두 사람이 따로 살 장소를 선택했고, 비류가 온조의 위례성을 보고 후회하여 죽었다는 것은 시조를 온조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정리된 것이다.

또한 온조왕 기록에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내려왔다고만 기록하여 주몽이 북부여 왕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류왕 기록은 우태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온조계는 백제의 출발을 고구려에서 찾고, 비류계는 부여에서 찾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은 북부여의 창업자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따라서 주몽은 북부여 왕족 출신인데, <삼국사기>'백제본기'는 주몽을 북부여 왕족 출신이라 명시하지 않는다.

이는 온조의 출신을 부여가 아닌 고구려에 묶어두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백제서기> 건국 서문을 보면, 동부여 제2대 금와왕이 우태의 생부다. 우태는 졸본태수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눈이 맞아 비류를 얻고, 이후 왕이 되어 백제의 모체인 졸본부여를 출발시킨다.

이 해는 서기전 47년으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서기전 37년보다 10년이 빠르다.

<삼국사기>보다는 <백제서기>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 <백제왕기>와 <백제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은 두 시조의 생부가 아니라 양부다.

소서노가 주몽에게 재가하면서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양자가 된다. 소서노는 둘째 온조보다 비류를 우선시한다.

비록 주몽에게 본거지인 졸본 땅을 넘기지만 소서노는 비류를 통해 잃어버린 졸본국 재건에 몸부림친다. 한반도로의 남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최종 승자는 비류가 아닌 온조였다.

온조의 후계자들은 과감히 생부 우태를 버리고 양부 주몽을 선택한다.

그런데 구태를 백제의 시조로 설정한 기록은 모두 중국 사서에만 나온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북사>와 <수서>를 비롯하여, <삼국지> '위서'와 <주서>, <통고> <당회요> <책부원귀> 등에 기록이 있다.

구태는 북부여 왕족 출신으로, 후한 말기인 2세기 전반에 중국 요동지역에서 활동한 위구태다. 위구태는 요서지역의 대방 땅에 서부여(122년 건국)를 건국한 창업자로 당시 선비족의 일파인 공손씨의 지도자인 공손도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혼인동맹을 맺기도 한다.

4세기 전반에 위구태의 후손 중 한 무리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온다.

<북사>나 <수서>의 백제전을 보면, '처음 백가가 바다를 건너왔기에 백제를 국호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가가 이동했다면 대규모 망명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백가제해(百家濟海) 집단은 한반도의 기존 백제(비류/온조의 해씨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백제(구태의 부여씨 왕조)를 건설한다.

<삼국사기> 온조왕 기록 말미에 '성씨를 부여로 하였다'는 기록은 구태 부여씨의 사실을 가져다 기록한 것이다.

백제 제26대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여 백제의 근원이 부여임을 재차 천명한다.

일본 에가미 나오미는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를 세운 왕조 세력을 북방 기마민족에서 찾았다.

게리 레이야드와 존 카터 코벨은 북방기마민족을 '대륙의 부여 전사들'로 이해하고, 그 실체가 '4세기 중후반에 한반도 서남부를 거쳐 일본을 점령한 백제세력'이라고 규정한다.

대륙의 부여 전사들은 바로 서부여 구태계이며, 한반도로 건너온 백가제해 세력이다.

구태는 백제의 진정한 시조이며, 구태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왕통을 이어간다.

또한 그 후손 중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마토를 창건한다. 그런 사유로 백제와 야마토는 한 핏줄의 형제국으로 깊은 우호관계를 지속한다.

야마토는 아무런 대가 없이 마지막까지 백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한반도 백제가 수명을 다하자, 야마토는 본격적으로 '일본화 과정'을 밟게 된다.

여기까지가 정재수의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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