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말 부패구조는 21세기 지금도 살아있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동학 농민군이 봉기

조병갑은 군수에서 물러나 유배, 판사로 복귀

동학혁명 총 사령, 해월 최시형 처형 판사로

증손녀 전 민주당 의원 조기숙, 조병갑 두둔

‘조병갑, 동학혁명 정당성을 위한 희생양이고

그가 동학혁명을 유발했다는 것은 역사 오류’

동학혁명 112주년 기념식에서 자신 발언 사과

 

▲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그는 과거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조병갑의 증손녀로서 조병갑의 행위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나중에 사과하였다. 자료: 제이티비씨 발췌.
▲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그는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조병갑의 증손녀인데 과거 조병갑의 행위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나중에 사과하였다. 자료: 제이티비씨 발췌.

 

<동학농민운동의 발단 :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은 살아있다>

1.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2. 연대기별 정리 : 군수 -> 유배 -> 판사

(1892.4월) 탐관오리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부임한후 만석보를 증축하여

거액의 물세를 받고 재산착취 등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었다.

(1894.2.15.) 학정에 못견딘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손에 만석보는 파괴되었다.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1895.7월) 우금치에서 동학군이 전멸한 이후인 1895.7월 조병갑은 사면을 받고 관직으로 복귀하였다.

(1898.7.21.) 동학2대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재판장은 조병직, 배석판사가 조병갑이었다.

3. 증조할아버지(조병갑)가 뿌린 것을 증손녀(조기숙)가 거두다

한편,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 수석(2005~6)을 지낸 조기숙(현 이화여대교수)이 바로 이 조병갑의 증손녀이다.

2006년 11월 <월간조선>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조기숙은 "조병갑이 동학농민운동의 정당성을 위한 희생양이고 조병갑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했다는 것은 역사적 오류"라며 항변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2006년 12월 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해 공식 사과했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