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박창화의 백제와 고구려 역사 필사본은 새로운 백제를 증언한다.

 

글: 김상윤 (광주마당 고문)

 

백제 개국의 어머니, 소서노는 졸본의 연타발 자녀

졸본은 현재 만주 요령성 조양이 유력하게 비정 돼

졸본에서 우태와 소서노가 통정, 비류와 온조 낳아

고구려 유리왕 때 비류와 온조와 고구려 삼분 통치

비류백제 도읍은 미추홀, 온조백제 도읍은 우양

우양은 현재 중국 요령성 요하 서쪽의 조양시로 비정

 

▲ 남당 박창화가 필사한 고구리사략에는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유리왕과 함께 고구려을 세개로 나누어 통치하였다고 한다(편집인 주).
▲ 남당 박창화가 필사한 고구리사략에는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유리왕과 함께 고구려을 세개로 나누어 통치하였다고 한다(편집인 주).

 

백제 건국신화 4-3-1

남당(南堂) 박창화(1889-1962)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궁내성 도서료(圖書寮)에서 근무하면서, 일본 왕실도서관에 있는 고사 관련 책들을 필사해 왔다고 한다.

김대문이 지었다는 <화랑세기>도 그가 필사해온 것이다.

'남당 필사본'은 주로 삼국의 사서인데, 백제편에 <백제서기>가 있다.

나는 이 책을 본 적이 없으나, 정재수의 <백제 역사의 통곡>에 백제 건국 시조들에 관한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우선 <백제서기> '건국서문'을 보자.

우태왕은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이다.(중략)

이때 졸본태수 연타발에게 소서노라는 딸이 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우태가 그 소리를 듣고 혼인을 청하려 졸본으로 가려하자 해부루왕이 우태의 어머니를 불러 두 사람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태는 사사로이 졸본으로 가서 소서노와 정을 통하였다.

연타발은 해부루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혼인시키지 않자, 두 사람은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으로 도피하였다.

하신(河神)에게 제를 올려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류라 하였다.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땅으로 맞이하였다.

때는 서기전 47년이다.

이 해에 해부루왕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바로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에게 명하여 졸본의 왕 노릇을 하게 하였다.

우태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상세하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우태는 동부여 제2대 금와왕의 아들이다.

우태는 졸본태수 연타발의 딸 소서노에게서 아들 비류를 얻고 이후 졸본부여의 왕이 되는데, 이때가 서기전 47년으로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서기전 37년보다 10년이 빠르다.

남당 필사본의 하나인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비류는 서기전 36년 온조는 서기전 33년에 출생했다고 하나, <백제서기> 기록에 보듯이 비류는 서기전 47년 온조는 서기전 44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서기전 37년은 비류의 나이가 10세가 되겠다.

소서노는 비류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몽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비류를 태자로 삼는 조건으로 주몽에게 졸본부여를 넘겼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서기전 21년에 예씨부인이 낳은 유리가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주몽은 서기전 19년 정월에 유리를 태자로 삼고 불과 40세의 나이로 9월에 죽어 버린다.

<고구려사략>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는데,

서기전 17년 정월, 순노와 불노는 비류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미추홀로, 관노와 계루는 온조에게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우양으로 하였으며, 연노와 황룡과 행인과 구다와 비리는 왕과 소황후가 함께 다스리도록 하여 소황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은 즉위 3년째인 서기전 17년 정월, 비류와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3분할하여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유리왕은 고구려 개국공신의 도움으로 즉위하지만 근본적으로 동부여 출신인 까닭에 고구려내 정치기반이 매우 취약했을 것이다.

당시 비류와 온조의 직책은 '엄표왕'과 '한남왕'이었다.

비류가 도읍한 미추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에 있는 미추홀은 아니라고 한다.

한반도의 미추홀은 만주에 있던 지명이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우양은 소서노의 본거지인 옛 졸본국 수도로 추정되는데, 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으로 본다고 한다.

다시 <백제서기> 비류왕 원년(서기전 18년) 기록을 보면,

원년 1월, 비류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는 오간 마려와 순서에서 남으로 가다가 패하를 건너 미추홀에서 모였다.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

유리왕의 분할통치 기간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비류가 엄표를 정리하고 먼저 고구려를 떠나 남하했고, 뒤이어 온조도 한남을 정리하고 비류를 따라 남하하여 미추홀에 도착한 후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백제서기> 비류왕 5년(서기전 14년) 4월, 왕이 동생 온조를 마한에 보내 땅을 빌렸다.

당시 마한은 쇠락하여 말갈 낙랑 가야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마한은 왕이 말갈과 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백리 땅을 허락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말갈은 북방의 여진족이 아니고 강원도 강릉 이북과 함경남도 일대의 예족일 것이다.

말갈이라는 명칭은 6세기 중반에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또 다른 '남당 필사본'인 <백제왕기> '비류왕' 조의 기록에,

13년(서기전 6년) 2월,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 61세다.

5월, 왕의 동생 온조가 한산 아래쪽을 다녀오더니,(중략)

7월, 온조가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나누어 살기를 청하였다.

비류왕이 허락하여 위례성의 백성들을 나누었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옮겨 살 것을 알리고 주변 경계의 땅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다.

<백제왕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공히 한산 천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소서노의 죽음이 곧바로 온조의 독립을 촉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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