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와 백성이 하나 되면 아무리 강한 적도 물리칠 수 있다.

 

글: 전집현(자유기고가)

 

1866 미국 상선이 공격하자 관찰사와 평양 관민이 격퇴

1871 미국의 강화도 공격으로 패배했으나 끝까지 싸워

이때 빼앗아간 군기는 회수돼 강화도 박물관에 다시 보관

뒤이은 프랑스군의 공격도 막아내어 자신감 얻은 정부

전국에 서양인을 서양인을 물리치겠다는 척화비를 세움

 

▲ 어재연 장군기를 약탈해 간 미군과 어재연 장군기. 제너럴 상선으로  평양을 공격하다가 평양의 관민에게 상선이 불타자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공격하여 조선군을 이기고 어재연 장군기를 약탈해 갔다(편집인 주). 자료: 위키피디아
▲ 어재연 장군기를 약탈해 간 미군과 어재연 장군기. 제너럴 상선으로 평양을 공격하다가 평양의 관민에게 상선이 불타자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공격하여 조선군을 이기고 어재연 장군기를 약탈해 갔다(편집인 주). 자료: 위키피디아

 

<장엄하고 처참했지만 결국 정신승리한 朝美戰爭>

1. 1866년 침략자 미국 상선 격침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 휘하의 관민이 합심해서 배에 불을 질러 격침시킨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다.

2. 1871년 미국이 보복했으나, 개항 실패하고 물러가다

이에 미국 정부가 자국민을 참살한 것에 대한 항의와

제국주의 시절 횡행하던 강제 개항을 시킬 의도로 1871년에 미군이 강화도를 침공하였다. 바로 신미양요이다.

1871년 6월10~11일 미국함대가 강화도를 초토화시켰다.

미국 함대사령관은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의 외손자 로저스제독(J. Rodgers)이었다.

미군 기록에는 "조선군은 돌멩이, 칼, 창, 흙을 던지며 죽을때까지 싸웠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영웅적으로 죽어갔다. 그 어떤 나라 사내도 이들처럼 가족과 국가를 의해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48시간 전투종료후 조선군 전사자는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반면 미군전사자는 3명, 부상병은 10명이었다.

미군은 이곳에서 사령관 어재연의 깃발 수자기(帥字旗)를 노획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했다.

미군측은 더 이상의 공격이 무모하다고 깨닫고 철수하였다.

3. 프랑스, 미국 침략을 막아내고 더욱더 쇄국정책

미국은 조선 개항에 실패했고 조선은 쇄국에 성공했다. 프랑스에 이어 미국의 무력침략까지 막아낸 것이다.

미군이 퇴각한 다음날 조선정부는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4.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다시 국내로

조선시대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기는 없었다.

장수를 뜻하는 수자가 쓰여진 수자기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꼿혀있는 깃발이다.

전투를 끝내고, 미군은 어재연 장군의 대장기였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갔다.

당초 어재연 수자기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2007년, 136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임시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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