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무력으로 패배한 동학혁명은 패한 것이 아니었다.

 

글: 오세훈(자유기고가)

 

리조선의 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하려 한 동학혁명

폭정 속에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사즉생 봉기

'우금치 전투'는 승패를 넘어서는 품격의 역사로 남아

다나카 쇼조,

“전봉준은 풍행 방정하고, 공명정대하며,

종교를 통하여 근본적인 개혁하려 봉기”

 

▲ 서기 2016년 10월 말 폭정에서 백성을 구하려는 시민들 촛불 들어 봉기했다.
▲ 서기 2016년 10월 말 폭정에서 백성을 구하려는 시민들 촛불 들어 봉기했다.

 

<제폭구민>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궁극적 목표였다. 민비와 그 척족이 권력을 쥐고 농단하는 동안, 나라는 늘 풍전등화였고,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싸우던 외세(청나라와 일본)는 그 존재 자체가 생존의 위협이었다.

전봉준은 그 일체의 학정과 위협을 사즉생과 임전무퇴의 정신으로써 대항해야 할 폭력으로 인식했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동기다.

그 폭력을 제거해야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백성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돕는 일이며, 그때 비로소 씨알들의 삶이 편안해진다는 것이 동학군의 신념이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고부에서 시작하여 전주까지 파죽지세로 달려갔다.

관군에게 압승을 거둔 농민군은 혁명전사로 변했다. 그 마음으로 우금치까지 폭풍 진격했다.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겨우 200명의 일본군과 3000명의 관군이 연합하여 2만 명의 동학군을 전멸한 것이다. 대포와 최신형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화승총과 죽창으로 대항한 '아군'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130년 전, 그 조상들이 당했던 폭력은 치명적이었다. 안팎으로, 무능하고 악마적인 왕조와 외세(청나라와 일본)는 잔인무도한 폭력집단이었다.

그래서 덤비려면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했다. 토끼 한 마리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달려드는 세 마리의 늑대들을 상대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뒤를 보지 않는 이들은 역사가 된다.

동학군의 반봉건, 반외세의 혁명 정신은 19세기 말 시대사조에 부합하는 근대정신의 핵심가치였다. '우금치 전투'는 승패를 넘어서는 품격의 역사다.

그 정신은 3.1, 4.19, 5.18, 6.29에 이어 촛불 혁명에까지 연면히 이어졌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死卽生 DNA'다.

▲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 정치가, 다나카 쇼조. 그는 일본 내 불의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 정치가, 다나카 쇼조. 그는 일본 내 불의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다나까 쇼조(1841-1913)는 일본의 지도자였다. "전봉준은 풍행방정하고, 공명정대하며, 종교를 통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하려고 했다. 일본 군대가 이를 알지 못하고 동학을 유린한 것은 개탄스럽다." 그가 '조선잡기'에 쓴 글이다. 큰 인물답다.

요즘 대통령 선거판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주류언론은 이제 본연의 더러운 장사치 직분조차 팽개쳤다. 여권은 처삼촌 뫼 벌초하듯 한다. 한쪽 지지자들은 광포한 군중이 되었다.

지금 이 나라는 '막가파'들이 판치는 '연성 폭력'(soft violence)의 현장이다. 몽둥이와 각종 흉기들 대신, 거짓말, 저주, 억지, 모략, 파렴치의 야비한 난장!

2022년 3월 9일!

나의 후보가 전봉준의 꿈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깃발을 이순신에게 남은 13척 전함의 돛에 달고 330척 적함(敵艦)을 섬멸하기 바란다.

그가 두 장군의 가르침으로, 100년 전과 다름없이 중미러일에 둘러싸인 조국을 지키고 마침내 비약시키기를, 그리하여 국운상승의 지도자가 되기를 하늘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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